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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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관광(6)
2013년 02월 12일 13시 06분  조회:11085  추천:1  작성자: 주청룡
조선관광(6)
다시 평양으로

 
모두들 호텔에 들어가서 자기의 짐들을 챙겨가지고 다시 뻐스에 올랐다. 처녀 안내원은 자기의 집은 여기 온정리에 있기에 곧 중국동포들과 갈라지게 된다면서 눈물이 글썽하여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 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하며 노래을 부르는것이였다. 그러자 뻐스안은 매우 쓸쓸한 분위기였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3일간 조선처녀와의 맺은 혈육의정, 곧 갈라지게 될 아쉬운 마음이 한데 뒤엉키면서 서로 서러운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뻐스가 온정리 마을에 이르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가볍게 손을 저으며 “잘 가십시오 안녕히!” 하며 우리와 석별의 인사를 하며 내리는것이였다. 우리도 “잘 있어요, 다시만나요”하며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뻐스가 금강산을 떠나 원산으로 향해 달리였는데 때로는 동해안 해변가를 따라 달리였는데 맑고 푸르른 바다가 끝없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없이 넓은 벌판을 달리기도 하였는데 대부분은 논이였다. 농사를 보면 우리 연변의 벼농사처럼 그렇게 굵다란 벼이삭들이 꽉 박아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선 농민들에게 풍작을 가져다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1): 주체농법
 

그리고 저 멀리 농민들의 주택이 보였다. 농민들의 주택이 내부구조는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볼 때 조선의 전통가옥으로서 모양을 보면 지붕, 벽체, 문 모양이 전부 똑 같았다. 지도원의 소개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도시든 농촌이든 국가에서 집을 지어 국가의 소유로 되고 입주자는 사용권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백성들이 집을 사려고 아글타글 돈을 모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농촌에서도 지금 주택개혁을 하여 새로 짓는 집들은통일적으로 2층, 3층로 짓는가고 한다. 저 멀리 보면 그런 층집들이드믄드믄 보였다.

사진(2): 농촌마을의 전경
 

그리고 때로는 철길옆으로 따라가다가 철길을 넘기도 하였는데 지도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철길은 원산으로부터 속초까지 이어졌으며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2007년 5월 17일에 경의선, 동해선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동시 시행되였던 것이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2008년 12월 1일부터 남북철도운행이 중단되였다는것이다. 다년간 기차가 다니지 않아 철길을 보니 전부 적갈색으로 녹이 끼여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남북의 혈육을 이어놓고 정을 이어놓으며 경제명맥을 이어놓는 이 철도운행  중단으로 하여 두나라 인민들에게 가져다 주는 심리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 났다.

사진(3): 녹쓴 동해선 철도
 

뻐스는 두시간을 달려 원산에 도착하였는데 갈때에 들러 저녁을 먹던 해변가에 자리 잡은 송도려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사진(4): 원산 송도원려관
 

만수대(寿)

원산에서 점식식사를 하고 뻐스는 다시 4시간 달려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제일 먼저 만수대(万寿台)로 갔다. 만수대는 평양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김일성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만수대로 올라가면서 관광객들은 길옆에 설치한 꽃가게에서 생화 한묶음 (인민페 20원) 씩 사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동상앞에서 헌화를 하고 숙연히 머리숙여 묵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모두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사진(5): 만수대 동상앞에서
 

만수대 근처에는 만수대의사당, 조선혁명박물관, 천리마동상, 모란봉극장, 모란봉청년로천극장, 아동백화상점 등 주요 건축물들이 있다. 그중 천리마동상(千里馬銅像) 은 만수대 언덕에 우뚝 세워져 있는 조각상으로서 청동 조각상 높이는 14m, 길이는 16m이며 받침대 높이는 32m, 총높이는 46m이며 1961년4월 15일에 제막하였다.

청동 조각상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편지(높이 1.3m×1m)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남성 로동자와 벼단을 안은 녀성 농민이 날개를 펼친 천리마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받침대는 화강암 2,500개를 붙여 제작되었다. 조국해방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들의 영웅적 기상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6): 천리마동상

만경대(萬景臺)

그다음 뻐스는 우리를 싣고 만경대로 향하였다. 만경대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들이 있으며 푸른 소나무와 버드나무들이 울울창창하다. 산봉우리에는 돌로 쌓은 고대의 봉화대가 있으며 봉화대 아래의 벼랑은 대동강까지 깍아내려 산의 모든 경치들을 거울처럼 대동강에 반사되여 만가지 경치를 다 볼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만경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만경대 주봉인 만경봉 정상에는 만경루(万景楼)가 있는데 거기에 올라서면 평양시의 전경에 다 안겨온다. 만경봉 기슭에는 초가집 한채가 있는데 김일성의 증조부때부터 4대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주석도 1912년 4월 15일 바로 이 집에서 태여났으며 동년을 이집에서 보내였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중국동북으로 걸어서 구학하러 갔다고 한다. 그뒤 부친이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는 또 걸어서 고향집으로 왔다고 한다. 김일성장군의 어머니와 동생 역시 혁명의 길에서 일본놈들의 총칼에 학살당하였다. 김일성장군은 조선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맞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다시 혁명투쟁의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 뒤 김일성장군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만주의 산천을 누비면서 일본제국주의와 피어린 투쟁을 투쟁을 벌려 드디여 1945년 광복의 그날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에 돌아와 군중대회에서 새조선의 탄생을 선고하고 그 이튿날로 고향집에 찾아와 친인들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생가울안에는 살림집, 창고, 외양간 그리고 다락이 있었으며 김일성 일가에서 사용하던 음식그릇, 농구, 가구와 김일성이 쓰던 책상 등 문물과 사진들이 진렬되여 있다.

사진(7): 김일성 생가
 

집주위에는 그네장, 군함암(军舰岩), 씨름장, 우물 등이 있으며 만경대 생가 기념비도 있다. 생가 부근의 언덕에는 만경대혁명사적관 있는데 거기에느 김일성 일가가 혁명활동에 종사해온 도편과 자료들이 진렬되여 있다.
사진(8): 김일성의 증조부모
 
사진(9): 김일성의 조부모
 
사진(10): 김일성과 그의 부모
 
만경봉 산기슭에는  조선인민군 만경대혁명학원과 만경대 유희장이 있다. 유희장에는 관성렬차, 대관람차, 관성단차, 회전비행기를 비롯한 40여종의 유희시설, 80여종의 전자오락기구들과 보트장, 활쏘기장 등이 있다.

사진(11): 만경대 유희장

개선문(凱旋門)

다음으로 개선문으로 갔다. 개선문(凱旋門)은 1982년에 평양시 모란봉의 개선문 광장에 김일성의 독립운동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개선문은 모란봉구의 모란봉대가와 개선대가가 이어지는 곳에 건축되였는데 이 문을 통하여 두 거리가 이어진다. 개선문은 파리시개선문이 모델이 되였는데 높이는 60m, 너비는 52.5m로, 파리에 있는 개선문보다 10m 더 높게 건축되였다. 남쪽 기둥에는 '1925'와 '1945'라는 수자가 새겨져 있는데, '1925'는 김일성이 조국 독립을 위해 고향집을 떠났다는 해인 1925년을, '1945'는 조국이 독립한 해인 1945년을 가리킨다. 개선문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1만500개의 화강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개선문의 남북 량켠의 문미(門楣)에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각기 1절과 2절로 새겨져 있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자욱 /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 력력히 비춰주는 거룩한 자욱 /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사진(12): 개선문
 
중조우의탑

그다음으로 우리는 개선문을 지나 중조우의탑으로 향하였다. 60여년전, 134만명의 중화의 아들딸들이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들고 조선전장에서 피흘리며 싸웠고 14만에 달하는 지원군 장병들이 조선땅에서 희생되였다고 한다.

우의탑은 조선인민을 도와 피흘려 싸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9년10월 25일에 평양의 명승고적인 모란봉의 북쪽기슭에 세운것이다. 건축지점과 건축조형은 1958년 2월에 조선 방문중이던 주은래총리가 김일성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선정하고 심사결정한것이라고 한다.

우의탑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일인 10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부분은 1025쪽의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한다. 우의탑의 총 부지면적은 12만평방메터이며 높이는 30메터이다. 그 주위에는 소나무, 전나무, 목란 등 1만9천그루의 화목들로 둘러싸여져있다.

사진(13): 중조우의탑
 
우의탑은 이로부터 한대 또 한대의 중조 두 나라 인민의 마음속에 뿌리 내렸다. 중국의 대표단들과 관광객들의 조선방문에서 우의탑의 참관과 헌화하는것은 거의 필수코스이다. 그리고 참전기념일이 되면 해마다 적어도 조선주재 중국대사관이 나서서 기념하고 중요한 해에는 고위급대표단이 나선다.

관광객들은 모두 꽃가게에서 생화를 사들고 조선전장에서 피어린 생명을 바친 수많은 지원군렬사들에 대한 경모의 심정으로 렬사비앞에 헌화를 하고 60여명이 집체적으로 세줄로 정연하게 서서 숙연히 세번 허리굽혀 절을 하였다.

중조우의탑은 두층의 기반과 탑신으로 구성되였으며 탑꼭대기에는 붉은 별이 반짝인다. 탑신의 앞에는 《우의탑》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탑기반의 1층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14): 우의탑비문
 
기반 량측에는 중조우의와 중국인민지원군용사들의 씩씩한 자태와 중조친선을 형상화한 미술작품들이 부각되여 있다 그리고 기반 뒤에는 문이 있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약 100m²되는 탑중심 대청이다. 대청 중앙의 대리석탁자에는 지원군렬사들의 이름을 적은 인명부(花名冊)가 있고 벽에는 세편의 대형벽화가 있었는데 참전편, 전투편, 건설편으로 되여 있었다. 벽화에는 자기의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은 황계광과 물에 빠진 조선의 어린이를 구하다가 희생된 라성교의 빛나는 형상이 각별히 눈에 띄였다.

 인명부는 열책으로 되여 있는데 총 22700명의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들의 이름과 적관, 희생된 년월일이 기록되여있었던것이다.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인명부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에서 1958년에 제공한 렬사명단에 의해 편찬한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택동동지의 아들 모안영의 이름도 있었다. 나는 모안영의 이름을 보는 순간 한 나라의 주석으로서 자신의 아들마저 가렬처절한 전쟁마당에 보내였고 모택동 자신도 수천수만의 지원군 렬사부모들 가운데의 일원으로 되였다는 그의 위인이 됨을 다시 한번 새삼스레 느껴보게 되였다.

당시 모안영은 사령부의 로어번역으로, 지금 중국조선족으로서 가장 명망이 높은 조남기는 사령부의 조선어번역으로 한 숙사에서 같이 있었다. 조남기가 모택동주석을 만날 간절한 마음을 표달하자 모안영은 “전쟁이 승리한후 우리 아버지 만나러 함께 가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안영은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많은 지원군 렬사들과 함께 조선땅에 묻혀져 있고 조남기 혼자 모주석 뵈러 갔다고 한다.

우의탑을 다 돌아보고 나는 중조인민의 피로 맺어진 우의와 피끓는 청춘을 이땅에 묻은 지원군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심정으로 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우의탑의 계단을 내려왔다.

우의탑을 내려와서 우리는 저녁식사하려 고려동포회관으로 향하였다. 여러 식당을 다니면서 먹었지만 아마 이 식당의 채들이 가장 풍성한것 같았다. 흑돼지 고기며, 물고기 튀김이며 하여튼 이름 모를 여러가지 채들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맥주며 기타 음료도 올랐는데 모두 무상이였다. 그러지만 배갈만은 없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무상으로 오른 맥주며 음료며 모두 신나게 마시면서 즐거움을 나누었지만 나와 김욱선생님 그래도 이런 채에 배갈이 좋다며 한병에 인민페로 30원 하는 평양술을 사서 마시였다.

식사가 거의 끝날무렵 조선의 처녀들이 하나씩 엇갈아 마이클를 들고 나와서 노래를 하는가 하면 몇이서 같이 나와 하기도 하였는데 인물도 예뻤거니와 목소리도 그렇게 청아하였다. 이때 나는 외금강호텔, 삼일포, 온정각 등 곳에서의 녀성복무원들의 모습을 련상하여 보면서 정말로 남남북녀라더니 그 말이 틀린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국에 가서의 인상이 보편적으로 남자들은 인물체격이 괞찬았지만 녀성들은 보편적으로 예쁘다하는 인상을 주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예쁜 얼굴에 꾀꼴새 같은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하니 관광객들도 너도 나도 나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하여 중조인민들의 우정를 더한층 융합시켰다.

김일성광장

저녁식사후 우리는 김일성광장으로 향하였다. 김일성광장은 평양시의 중심구역 대동강변 서쪽에 위치하여 있었다. 1954년에 건설되었으며 면적은 약 7만 5,000㎡이다. 44만평방메터되는 천안문광장에 비하면 1/6에 거의 해당하지면 그래도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광장이라고 한다. 광장은 직사각형이며 지면은 화강암으로 포장되였으며 중대한 정치문화활동, 경축대회, 공중집회, 열병식을 진행하는 장소이다.

광장서쪽의 건물은 인민대학습당인데 1982년에 개관되였으며 조선의 대표적인 복합문화시설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10동, 10층으로서 34개의 전통조선식의 청기와로 된 지붕으로 되여있으며 총건축면적은 10만 m²로서 집 높이는 64m, 너비는 151m, 길이는 190m이다.

인민대학습당은 5000천개의 좌석에 1만여명을 용납할수 있으며 3천만권의 도서가 있으며 600간의 열람실로 되여 있으며 녹음실, 학습실, 강의실 등 시청각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인민대학습당의 광장을 마주 한 건물은 경축대회, 공중집회, 열병식을 진행할 때에 주석대로 사용되고있다.


사진(15): 김일성광장과 인민대학습당
 
광장 남쪽에는 조선미술박물관이 있고 북쪽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 있으며 동쪽은 대동강이고 대동강 건너편에 바로 주체사상탑이 있다.


사진(16): 주체사상탑의 야경

    양각도 국제호텔(羊角島國際饭店)

김일성광장을 다 구경하고 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뻐스는 우리를 싣고 양각도 국제호텔로 향하였는데 지도원은 양각도 국제호텔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양각도 국제호텔(羊角島國際饭店)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지금 사용중에 있는 호텔로는 가장 큰 호텔이자 호화스러운 호텔인데 대동강 한가운데 있는 양각도(섬이 양뿔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양각도라고 부른다.)에 위치해 있으며 1995년에 개관했다고 한다.

호텔은 부지면적은 10만m², 총건축면적은 약 9만 m²에 47층으로 되여 있으며 현대화 설비를 갖춘 1000여개의 부동한 등급의 객실이 있고 한다.

사진(17): 양각도 국제호텔
 
지하에는 오문에서 관리하는 식당, 나이트클럽, 사우나, 도박장이 있다. 1층에는 수영장, 안마실, 사우나 보건중심, 볼링구장, 당구장, 카라OK실, 리발실, 미용실 등이 있다.

2층에는 600명을 용납할수 있는 연회청이 있으며 4개의 식당이 있는데 각기 조선료리, 중국료리, 서양료리 등을 한다. 그리고 회의청, 회담실, 동시통역회의청, 국제통신소(국제우전업무와 전자우편을 처리)가 있으며 다방, 상점, 화페태환처, 서점, 사진관도 있다.

중앙대청에는 수족관이 있는데 철갑상어, 도미 등 이름도 못 들어본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있었다. 47층은 130개 좌석의 원형 회전음식점으로서 음식을 먹으면서 평양시의 전경을 다 구경할수 있다. 밖에는 9000m²의 골프장과 뽀트놀이, 낙시터가 있다.

호텔에 숙소를 잡고 보니 정말 현대화한 설비였다. 그런데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인터넷이 련결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인터넷이 많이 공제되여 있는 모양이였다.

지도원의 소개에서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회전 음식점과 지하도박장이였다. 하여 호텔에 들어 행장을 풀어놓자마자 평양시의 야경을 보려고 인차 승강기를 타고 회전음식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밤 10가 넘은지라 고객들이 얼마없고 띄염 띄염 2,3명씩 앉아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점은 회전하지 않았다. 복무원 처녀와 왜 회전을 하지 않는가고 물으니 손님이 이렇게 적을 때에는 회전를 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벽이 전부 유리로 되여 있기에 빙 돌아 가면서 평양시의 야경을 다 구경할수 있었는데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광장이 가장 뚜렷이 알렸다.

평양시의 야경을 감상하고 다시 승강기를 타고 지하도박장으로 내려 갔다. 도박장 어구에는 보안일군들이 서 있었는데 도박장 구경을 왔다고 하니 한 사람이 나를 안내하여 도박장 안으로 안내하였다. 도박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군데 군데 여러곳에서 도박을 노는데 도박을 노는데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도박을 노는 방법을 모르니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하면 돈을 따고 어떻게 하면 돈을 잃는지 몰라 구경을 한다 하여도 재미는 없었다. 그리하여 10여분 구경하고 올라와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는 여러가지 책들이 진렬되여 있는데 평양지도와 조선관광을 소개한 책이 나의 눈에 들어 그것을 샀다.

[후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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