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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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사회대망론(待望論) (이승률)
2010년 04월 05일 21시 48분  조회:4902  추천:40  작성자: 이승률

조선족사회대망론(待望論)

 
이 승 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중국과 함께 중국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이 시대의 국제 정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이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비단 외국 국적을 가진 특수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 안에 있는 양식 있는 지식인들과 사회단체 리더들도 ‘더 큰 중국’을 바라보며 중국과 세계를 합목적(合目的)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중국 역시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면서 이젠 국가 정체성과 체제 유지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실생활 면에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을 최대한 보장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업적은 연평균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과 세계 3위의 경제 규모를 기반으로 중국 특유의 정치 제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힘을 실어 주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지난해 연말 개혁·개방 30주년 기념사에서 “이 모든 성과는(우리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이어서 “부단한 정치 체제 개혁 없이는 지속적인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가 이뤄질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우리는 인류 정치 문명의 유익한 성과를 참고하겠지만 절대로 서방 정치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중국의 학자 가운데 일부는 최근 중국의 발전 양식을 ‘중국 모델’ 또는 ‘베이징 컨센서스’라고 부르며, 하나의 모델로 전파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베이징 주재 하종대 특파원(동아일보사)은 “중국 개혁·개방의 성공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와 결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어서 “개혁·개방은 자유와 민주, 인권과 법치 등 인류 보편의 가치와 결합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시장경제의 채택으로 국가가 속박했던 개인의 경제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초고속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중국 학계 내의 많은 학자들도 지도부의 ‘중국 특색’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는 않는다. 상당수 학자들은 중국이 자유와 민주, 인권과 법치 등 세계 보편의 가치와 함께 갈 때만이 개혁·개방에 성공하고, 나아가 중국의 최종 목표인 현대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후진타오 주석은 개혁·개방 30주년 기념사에서 ‘중단 없는 개혁·개방’과 ‘중국 특색의 정치 체제 개혁’을 외쳤지만, 이 ‘특색의 정치 체제’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 내 학자들 사이에 중국이 과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정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하종대 특파원의 칼럼을 읽고 나서 나는 문득 지난해 3월 말 베이징대 컨벤션센터, 즉 ‘영걸 교류 중심’의 프래스 홀(Press Hall)에서 열렸던 ‘21세기 동북아 협력과 『동북아 시대의 조선족 사회』 출판발행좌담회’를 떠올리며 여러 가지 깊은 상념을 갖게 되었다. 그 좌담회는 다름 아닌 나의 졸저 『동북아 시대와 조선족 사회』(박영사, 2007)의 중문판 출판을 기념하여 베이징대 동북아연구소가 주최해 준 행사였다. 좌담회 식장에는 중국사회과학원·베이징대·인민대·중앙민족대 등에서 다년간 국제 관계와 소수민족 문제를 다뤄 온 전문학자들과 주요 기관장, 기자단, 축하객들이 많이 참석했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출판좌담회의 주요 맥락은 한마디로, 동북아 국제 협력에 있어서 유능한 매체 집단으로 등장한 조선족 사회를 보다 더 창의적이고 생산성 있는 단계로 이끌어 내어 한·중 간, 북·중 간, 중·일 간의 공동 문화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일어와 영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조선족 사회의 복합 문화력을 장차 도래할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징검다리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으로 육성하자는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었다.  

중국의 교육 문화 핵심기관인 베이징대에서 이러한 논의가 진지하게 토론되고 협의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민족애’를 느꼈다. 이러한 ‘민족애’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동시에 뿌리 의식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는 감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닫힌 민족주의’가 결국 순수한 민족애로 끝나지 않고 악독한 국수주의로 변질되어 그 민족 자신을 멸망의 길로 이끈 사례들을 우리는 세계 역사를 통해 뚜렷이 알고 있다. 독일의 파쇼 집단이 그랬고,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그랬다. 내가 조선족 사회에 관한 책을 쓰면서 줄곧 주장한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윈-윈 패러다임(Win-Win Paradigm)의 정신이었다. 즉 ‘Open Mind & Network, Global Standard, Positive Sum Game’에 임하는 정신 자세와 태도였다. 

특히 오늘날 국제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세계화’와 ‘지역화(블록화)’의 이중적 갈등 구조를 풀어 가는 데는 세계와 지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매체집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람의 인지도와 상호관계(Networking Relationship) 속에서 생겨난다고 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중화경제권을 배경으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크게는 일본과 북한까지 포함하는 동북아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집단이 있으니, 이는 곧 조선족 사회다. 일찍이 맹자는 왕도론(王道論)에서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말했다. 즉 좋은 시기는 유리한 지형만 못하고, 유리한 지형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화합이란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족은 좋은 시기와 유리한 위치 그리고 사람의 화합,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족의 중국 이주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인 조선 말기부터 시작됐다. 그러다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시작된 이후 1918년까지 집중적으로 늘어나 약 4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후 그들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족의 항일 독립 투쟁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중국 공민의 일원으로 편입돼 변경 지역의 폐쇄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숱한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면면히 조선 민족으로서의 민족 문화를 지켜 왔다. 현재 약 200만 명으로 늘어난 조선족 사회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과 한중수교(1992)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낼 인재 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21세기는 흔히 신문명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한 변화의 분기점에 와 있다. 미래학자 죤 나이스비트가 말하는 ‘탈(脫)중심화’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접경 국가들 사이에서는 ‘중층성 다공화’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즉 민족·영토·국가와 같은 전통적 규범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적인 경향을 바탕으로 EU와 같은 초국가 연합체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위치상 세계의 변방에 있는 한국도 이와 같은 시대 변화 가운데 어떻게 세계 속의 한국으로 발돋움할 것이며, 또한 남북 분단과 중국 및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점을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어찌 보면 중국의 조선족 사회도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변방에 있으면서 한반도와 중국의 접경지대에 살고 있어서 간도(間島)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또한 분단된 모국 즉 한국과 북한 양쪽을 공히 잘 대응해야 하는 이중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이와 같이 복잡한 여건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는 집단이 바로 조선족 사회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2년 전에 일본 구마모토 시에서 ‘제7차 환황해 경제·기술교류회의’가 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본다. 이 국제회의는 한·중·일 3국의 산·학·관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수준 높은 엘리트 그룹의 국제 행사이다. 그런 만큼 나는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계획에도 없던 특별 프로그램을 하나 진행해 봤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느 한 세션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하는 그룹,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그룹, 그리고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룹을 별도로 구별해 보는 일이었다. 그때 모인 한국인·중국인·일본인들의 대부분은 한 가지 언어 또는 두 가지 언어 사용자 그룹으로 모였는데, 유독 조선족 출신의 일본 유학생들과 취업 인력들만이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그룹으로 분류됐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심으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조선족은 태어나면서부터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습득하는 환경에서 자란다. 그리고 고등학교 이후에는 일본어 또는 영어까지 교육받는다. 이와 같이 중국과 한반도 양대 국가 사이에 끼어 있는 변경 소수민족으로 이중 문화를 무리 없이 융합하고 재창조하는 유연한 문화적·감성적 특질을 생래적으로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변연복합문화(邊緣複合文化)형의 구역 가치와 경쟁력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인정이 많고 우애롭다. 남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미덕을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근면한 성품과 명석한 두뇌로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중지능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 교육심리학과 하워드 가드너 박사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의 지능을 단순히 IQ인 지능 지수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능력·창의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평가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다중지능은 언어·논리 수학·음악·공간·신체운동·인간 친화·자기 성찰·자연 친화 등 여덟 가지로 나누어 평가되는데, 나는 조선족이야말로 중국 내 최고의 다중지능 인재들이라고 믿는다. 

사업에 있어서도 이들은 소수민족 가운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대사업가가 상당수다. 1980년대 중국 개혁·개방 초기 때 전국 10대 기업가로 추앙받던 창녕그룹의 석산린 총재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시장경제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북한과 인접해 있는 국경지대에서는 다양한 변경 무역이 성행했는데, 거기에서도 조선족 기업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북한 나진항의 무역특구 같은 곳에 조선족 건설업계가 진출해 있으며, 두만강 무산광산 지역에 버려져 있던 폐석을 북한 측으로부터 사들인 것도 북한과 교류가 빈번한 조선족 기업이다. 두만강변 무산광산에는 북한이 캐다가 버린 폐광석이 널려 있다. 북한은 이것을 재가공할 산업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 아무 대책 없이 이를 강변에 버려두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조선족 기업에서 폐석을 사들여 북한 경제에 도움을 주고, 반대급부로 이 기업은 폐석을 재가공해 팔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 15톤 트럭 100대가 무산광산을 드나들 정도였다. 그 과정을 통해 북한은 버려진 폐석들조차도 기술이 있으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조선족과의 거래가 중국인들과의 거래보다 훨씬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경험했을 터이니, 나는 그런 면에서 이러한 변경 무역을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사실 조선족 사회는 이런 대형 기업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개 보따리 장사들까지 북한 주민들에게 시장경제를 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소위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도매로 의류나 여성용품들을 사들인 뒤, 이를 중개 무역 형태로 되팔기 위해 북한 국경을 넘나드는 조선족 보따리 장사들이 상당수다. 이들은 폐쇄적인 김정일 체제 속에서 시장경제를 전혀 모르는 북한 주민들에게 배급이 아니라 재화의 교환 형태로 이루어지는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가르치고, 그 요령을 알게 하는 첨병들이다. 장차 통일이 될 때를 대비하여 북한 주민들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경험과 지식을 이들이 가르쳐주고 있는 셈이니 우리로선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지금 조선족은 동북아 시대의 패권을 놓고 중국·일본·한국의 기업들이 모두가 탐내는 최고의 인재 그룹 파트너로 성장해 있다. 타고난 지리적·문화적 특수성으로 인해 다문화 사회에 적응하는 유연한 기질과 재능을 갖춘 조선족들은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세계화 시대에 매우 적합한 이상적인 촉매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아직은 인구수가 적고 중국의 소수민족 통치 방식에 묶여 있어서 중국 사회 속에서는 여전히 약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장차 인재 양성과 국제 교류 등으로 왕성하게 거듭날 수 있다면, 조선족 사회는 초국가주의 신문명 시대를 준비하는 ‘코스모폴리탄 매트릭스’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 동북아 사회를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유용하게 쓰임받는 선구자적 위상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30년간의 중국 발전상을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관건은 1970년대 말 이후 개혁·개방과 함께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국가가 속박했던 개인의 경제자유권을 보장했기 때문에 초고속 발전이 가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사회가 갖고 있는 이러한 시대적 역량을 증진시켜 앞으로 중국을 동북아공동체사회의 튼튼한 기초 베이스로 만드는 일에 촉진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조선족 인재 집단이 국제사회에서 자유·민주·인권·법치 등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결합하는 또 하나의 창의적인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조선족 사회도 엄청난 책임감을 갖게 되리라 본다. 조선족 인재들이 중국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을 많은 중국인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중국 정부로 하여금 소수민족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점차 심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중국 내부의 소수민족과 한족 간의 갈등을 일방적인 억압과 규제로 증폭시킬 것인지, 아니면 상생과 협력의 관계로 완화시켜 갈 것인지에 대해 중국 사회에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표적인 민족으로서 조선족을 가장 유력시할 만하다. 이와 같이 조선족 사회는 자신들만이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는 여러 소수민족의 미래에 대해서도 공동의 책임감을 느끼고 적절히 대응해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어야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 사회에 대해 편협한 민족주의에 의한 값싼 동정심으로서가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의 순수한 인류애(人類愛)적 차원에서 그들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이를 토대로 한민족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국제사회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와 ‘포지티브 섬’을 지키는 유용한 인재집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누가 이 시대를 이끌 것인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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