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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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2008년 11월 14일 11시 46분  조회:3652  추천:80  작성자: 이승률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
           평양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





마지막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대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식당 바깥으로 나가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새벽기도를 하러 갈 작정이었다.

나는 요즘 새벽기도 가는 일에 상당히 충실해졌다. 미국 유학 갔던 막내 딸(현주)이 지난 년말에 귀국해서 SK건설에 입사했는데, 근무지가 시내라서 남산 기슭에 있는 숭의교회에 갔다가 딸을 회사에 출근시켜주고 집으로 돌아와도 아직 7시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딸과 같이 새벽기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애를 출근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재미가 났고, 또 아침시간 관리상 매우 유익했다.

버릇이란게 참으로 무섭다.

전에는 게을러서 새벽기도를 엄두도 못 냈던 사람인데, 요즘은 거의 자동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진다.

마을 뒷산 언덕으로 올라가는 곳에 콘크리트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양쪽에 붉고 노란 천으로 만든 깃발이 수십개 꽂혀 있다. 계단 입구에 안내판이 하나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어제 저녁에는 일행들과 함께 급히 올라가는 바람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엔 시간이 많으므로 차분히 내용을 읽어봤다.

「古樹名木 三胎松」이라는 제목 아래 세 그루 소나무에 대한 내력이 자세히 적혀있었다.(참고로 전문을 게재한다.)

『목명 : 적송, 수령 : 천 여년
연변주 림업국 과학연구소 감정.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합수목마을 동쪽 산자락에 고수 세 그루 소나무가 있다.

1. 제일 아래쪽 노송 : 높이 7.5m, 둘레 2.3m, 수관폭 13m,
                 모양 : 천자가 행차 시 사용하던 일산(햇빛 가리개 우산)과 같다.

2. 두 번째 노송 : 높이 9.3m, 둘레 2.6m, 수관폭 14.5m,
                 모양 : 대붕이 하늘을 치솟아 오르려는 듯하다.

3. 세 번째 노송 : 높이 10m, 둘레 2.3m, 수관폭 17.5m,
                 모양 : 거룡이 꿈틀거리는 듯 하다.

이 세 그루의 노송은 부르하통하(河) 건너 고구려, 발해시기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동하국(東夏國)의 수도 성자산성(城子山城)과 약 1km 떨어져 있고, 해란강 건너 고구려 발해시기 중요한 평원성(平原城)이었던 하룡토성(河龍土城)과 약 1.2km떨어져 있다.

청조말기 광서(光緖) 30년(1904)과 광서 32년에 전후하여 조선 함경북도 명천 밀양박씨(明川密陽朴氏) 박중근(朴重根)형제, 길주 양천허씨(吉州陽川許氏) 허웅범(許雄範)3형제가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노송을 발견하였다.

그 후 명천, 영안, 길주, 화태군 등에서 박씨, 허씨 몇호와 리씨(李), 김씨(金), 강씨(姜)가 몰려왔다. 民國 18년(1928)에 이르러 80여호의 큰 마을 하룡촌(河龍村)이 중심 마을로 되고 신룡갑(新龍甲)이라 하였다.

그 당시 국자가로 이루어진 연길시 근처(연길분지)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박씨, 허씨들의 마을이었다.

세 그루 소나무를 주민들은 신룡툰(新龍屯)의 상징으로 성송(聖松)으로 모시면서 대대로 살아왔다. 3송(松)은 나무마다 천여개의 년륜이 똑같이 새겨진 삼태송(三胎松)이라고 한다.

무궁무진한 재부를 가진 「古樹名木 三胎松」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재벌나무의 하나이며, 가장 인기를 끄는 관광물로 장백산과 더불어 연변의 지명도를 높여주고 있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관광객으로 인하여 고향의 륙모진 모래길은 팔모진 모래길로 되어 가고 있다.

현재 매년 춘추 가일(假日)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산에 도착해서 본 지역을 앙연(昻然)한다.

연길시 소영진 하룡6툰 로년회(小營鎭 河龍六屯 老年会)』

좀 길게 인용되었지만, 전문을 다 수록하고 싶은 이유는 이 지역이(안내판에서 본 것처럼)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마을로 이주하여 온 조선인들은 당시 연도로 보아 이조말기 일본의 합병과 수탈에 저항하여 두만강을 넘어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하는 이곳에 농경지를 가꾸고 수전(水田)을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을의 지형지세가 자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아마도 마을 뒷산 언덕에 있는 세 그루 노송을 삼태송(三胎松)이라 부르며 신주처럼 숭상했을 것 같다.

언덕에 올라서서 보니 멀리 연길 시(市)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세 그루 소나무 사이의 공지에 관광객들을 위해 설치해 놓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우선 소하룡(小河龍) 마을이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合水)되는 지점에 있다는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조선(한반도)과 청나라(중국)가 함께 합류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부르하통이란말은 본디 만족어로서, 버드나무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변에 1km정도 밖에 안 떨어진 곳에 고구려성과 발해성이 있다고 하니, 이곳은 원래 한민족의 고토임에 틀림없다. 단절된 천년의 역사가 일순간에 현실로 재현되어 그 맥을 같이 이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곳 한 가운데 입지한 소하룡(小河龍) 마을 뒷산에 천년도 넘게 살아온 세 그루의 노송이 버티고 있다. 그것도 삼태송(三胎松)이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리며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땅을 살고 간 선조들은 왜 이 소나무들을 삼태송(三胎松)이라고 불렀을까?

'아이 밸 태(胎)'자인 이 말은 분명히 아이를 잉태하거나 씨앗을 배태할 때 쓰는 용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세 그루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무슨 꿈을 잉태했고, 무슨 소망을 배태하였을까?

잃어버린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는가?, 아니면 멀리 사라진 고토의 회복을 소망했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듯한 전율을 느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닫고 이해하고 결단해야 할 역사의식은 무엇인가?

이 천년송 아래 벤치에 앉아 새벽기도를 올리며,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미래 천년을 향해 나는 무엇을 꿈꾸고 소망해야 할 것인가?

나는 더 깊이 묵상에 빠져들었다.

멀리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소생한 한 줄기 청량한 기운이 지중해를 건너 로마와 유럽으로 뻗어 나가는 환상이 보인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사도행전 16:9)"

원래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쪽으로 바꾼 이 환상은 단순히 일 개인의 심중에 나타난 계시였지만, 장차 세계역사 흐름의 진로를 백팔십도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제3차 선교여행(AD53~57년)을 마친 뒤 결국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군선에 이끌려 지중해를 건넜던 바울의 로마행을 두고,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 장면을 "세계역사를 싣고 가는 배"라는 극적인 표현을 썼다.

신세계를 향한 역사흐름의 새로운 진로는 결국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AD313년)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갔으며, 그 후 영국과 대서양을 건너 미국 신대륙에 정착함으로서 그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그 후 1,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 온 복음의 물결은 일본을 지나 한반도에 머물면서 오랜 세월동안 일제 압박과 민족의 분열과 동족상잔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한민족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그 결과로 한국은 급기야 전후 최대의 급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국가로 변신했으며, 지금은 제2 세계선교대국으로 발전하여 이웃나라 중국과 세계 여러지역을 섬기며 선린의 우정을 나누는 복된 국가가 되어있다.

오늘날 중국에 전파된 기독복음화의 물결은 단순한 종교의식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봉사와 구제를 통해 인간적인 신뢰를 증진시키고 생활문화 정서를 윤택케하는 도덕의식의 규범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의 노력이 중국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변화된 중국과 함께 천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중동으로, 마침내 예루살렘 시온성에 까지 이르는 서진화 복음의 물결, 이것이 내가 꿈꾸는 세계역사의 흐름이다. 이것이 또한 한국 기독교가 세계역사 앞에 나아가야 할 길이다.

1930년대 미국 시카고에서 발원한 CBMC 사역의 길이 한국을 거쳐 중국에 이른것도 이와같은 서진화 운동의 한 증거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 1994년 8월 1일 중국 최초로 한인 기독실업인회가 연길에 창립된 이래, 이를 계기로 중국 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CBMC 사역의 길은 마침내 중국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그 열기가 중앙아시아, 중동지역까지 뻗어 나가는 실크로드 미션의 새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연길은 조선족 사회의 중요한 핵심도시 일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에 있어서 1990년 10월 이후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한 육영사업의 터전이 되어 주었으며, 또한 CBMC사역의 첫 열매가 되어 주었고, 나아가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집필하는 요람이 되어 주었는가 하면, 마침내 최근에는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를 통하여 두만강유역개발사업(UNDP 프로젝트), 환동해·환황해 경제권개발계획, 남북한 경제공동체, 동북아기반시설 및 물류체계 개선을 위한 R&D 분야까지 섭렵하는 기회의 땅으로 부상해 있다.

【※ 참고 자료】지난해 9월 18일 창립총회를 거쳐 11월 1일부로 통일부 등록 사단법인으로 출범했던 동북아공동체연구회의 설립취지와 사업목표를 '회장 인사의 글'로  대신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날 지구촌사회는 지난 세기 냉전시대를 주도했던 이념의 장벽들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국제협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남· 북한의 문화교류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 통일의 꿈을 이루어내는 일은, 이제 남한과 북한만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가 국제협력을 통해 함께 이루어 내야 할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동북아공동체연구회는 바로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깊이 인식하면서, 1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즉,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는 동북아 역내 시장의 자유화와 경제공동체 조성을 위한 국제협력 방안을 연구하고, 정책 대안 개발, 자문 및 용역 등의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환경 조성과 동북아공동체 형성에 기어코자 하는데 그 기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전략으로 한미동맹의 기반위에 중국과 일본을 한반도의 양 날개로 접속함으로써 동북아가 ‘한 몸’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일본 열도와 한반도, 중국 대륙 및 러시아 극동지역을 한마당의 통합시장(동북아 FTA)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교통망 · 물류유통망· 정보통신망 등을 연구· 개발(R & D)하여, 실질적인 비즈니스 프로젝트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동북아 사회를 유기적인 국제 협력의 경제공동체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 한반도가 명실상부한 동북아공동체의 중추적인 중립지역이 되고, 그 결과 우리들의 숙원 과제인 남북한 통일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함께 꿈꾸며 나아갑시다.

동북아공동체 실현을 위한 노력이 곧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한 지름길이요, 남북한경제협력체 건설이 곧 동북아 통합시장으로 나아가는 길목임을 깨닫고, 우리 다함께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 나가는 일에 한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과업을 위하여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기원합니다.』

누가 나에게 당신의 경영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인재(人材)중심의 경영철학, 즉 교육을 기반으로 하여 인적자본(Human Capital)을 널리 육성하고, 이들을 통하여 기업의 목표를 창의적으로 극대화시키는 일이 경영의 핵심가치(Core Value)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동안 만 18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연변 지역을 통하여 만나고 교제하고 협력하며 동고동락해 왔던 인재들이 그 얼마인가!

또한 이곳을 발판으로 시작된 CBMC 사역의 확장을 위해 중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는 도중에 만났던 수많은 중국 기업인들과 중앙민족대 학위를 통하여 교류했던 소수민족 엘리트들의 수는 또 얼마인가!

사람, 사람, 사람........

중국의 인재들, 기업인들, 친구들.......

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기초가 바로 이곳 연길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이 땅은 곧 내 인생 후반전에 있어서 새로운 꿈과 소망을 잉태한 기회의 땅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하는 이 소하룡(小河龍) 마을에 정착한 선열들도 바로 이와같은 인간관계의 중첩속에 꿈과 소망을 잉태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샘솟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온갖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땅을 활동무대로 삼아 말 달리며 독립 운동했던 김좌진, 홍범도, 이동녕 등 선구자들의 모습이 망막에 떠오른다. 나무 잎에 이는 바람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조렸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이 기억난다.

이 땅을 배후지로 삼아 청(淸)나라를 일으켰던 누루하치의 변발한 모습이 눈에 띄고 그 청(淸)나라가 망할 때, 황실의 마지막 지도자로서 연변에서 생산된 "동백미"를 먹고 살았던 부의(溥儀) 황제의 초상도 눈에 띈다.

TV 드라마상으로 본 고주몽(송일국)과 대조영(최수종)의 모습이 망막에 떠오르고 그때 그들이 착용했던 갑옷과 머리띠와 장검이 분장도구가 되어 내 몸에 입혀진다. 그리고 그 갑옷을 입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장검을 손에 든 채 또 한사람의 새로운 내가 적토마를 타고 천하를 호령하며 중원을 향해 내닫는 환상이 꿈속에서 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고 상식적으로 수습이 안되는 잡념들이 계속 출몰하다가 드디어 뇌리속에 "도쿄에서 런던까지" 달려가는 KTX의 장쾌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와함께 일본 열도를 출발한 대중교통·운송 수단들, 즉 승용차, 버스, 트레일러들이 한·일해저터널을 통과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부산에서 원산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 보이고, 이들 중에 어느 차들은 한·중해저터널을 통과하여 산동반도를 거쳐 아시안 하이웨이를 타고 상해, 심천, 홍콩으로, 더 밑으로는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달려갔으며, 또 어떤 차들은 서울과 평양, 신의주, 원산을 거쳐 북방으로 나아가 TCR, TMR, TSR등과 연결되어 중국 내륙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까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 선로와 하이웨이를 따라 올림픽 성화가 봉송되는 장면이 망막에 클로즈업된다.

1964년 동경올림픽의 성화가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장에 이송되고, 그 성화가 다시 2008년 북경올림픽 냐오차오 스타디움의 성화대에 점화 되었다가 대회가 끝난 후 다시 중국 내륙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져 마침내 2012년 런던올림픽 경기장 성화대에 점화되는 장면이 생생하게 눈에 떠올랐다.

수많은 국가의 인종들과 소수민족 구성원들이 "도쿄 올림픽에서 런던 올림픽까지"가는 장거리 레이스에 참가해서 무리를 지어 달려가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KTX도 달려가고, 승용차와 버스와 트레일러들도 줄지어 달려가는 그 사이에 성화를 높이 든 주자가 머리띠를 동여매고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이 계속 얼굴이 바뀌면서 망막에 떠오른다.

그 주자들 가운데는 「민박회」일원인 우런 박사의 부군되시는 걸투 박사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달려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는 내몽고 출신의 몽골족으로서, 영국 옥스퍼드에서 석사를 했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중국 바이오(Bio)산업 육성을 선도하는 국가급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번 북경올림픽 성화봉송 시 후허하우터 시내를 뛴 주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천년송 고수 삼태송(古樹 三胎松)의 그루터기에 앉아 인류역사의 강이 어디로 흘러 갈 것인지를 묵상할 때, 내 마음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난 한줄기 청량한 기운은 차츰 나의 의식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민박회」소수민족 엘리트들과 함께 어울려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소하룡이라면 그럼 대하룡(大河龍)은 어디에 있는가?

북경인가? 우루무치인가? 알마티인가? 이스탄불인가?
'뜻으로 본 세계역사'의 흐름은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21세기 실크로드의 시발점이 어쩌면 이곳 연길을 중심으로 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지금은 남북한이 단절되어 있어서 교통과 물류가 제대로 흐르지 않는 변방의 오지로 남아있지만, 만일 한반도의 양 진영이 서로 공존하거나 통일되는 시기가 온다면 이 지역은 UNDP의 두만강유역개발계획과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북진흥전략'이 맞물려 국제사회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시너지를 유발하는 지역으로 변모될 것이다.

또한 흔히 간도땅이라 불려왔던 이 지역은 '잠자는 땅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연해주 일대)와 어깨를 맞대고 있어서, 장차 중국의 '시장'과 시베리아의 '자원' 그리고 한국,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융합시키는 새로운 희망의 기지(基地)로 삼기에 족한 곳이다.

다시말해 이곳은 많은 경제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이 예견했듯이 중국, 러시아, 북한이 3중으로 직접 접경해 있고, 그 주변에 주요 이해당사국인 한국, 일본, 미국이 둘러싸고 있는 이상적인 퓨전지역(Fusion Area)이다.

앞으로 아시아적 협조사회(Cooperative Society)의 테스트 베드(Test Bed)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윈윈(Win-Win)패러다임의 현장이다.

다만 이러한 전망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단연코 북한 핵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고, 또한 중국 정부가 한반도와 접속되어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한민족 경제교류협력지역으로 용인해 줄만한 도량을 보여야 가능 할 것이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될 때 등소평 주석이 심천을 창구로 삼아 홍콩과 동남아지역의 화교자본을 끌어들인 것이 성공적인 시발점이 되었듯이 북한과 러시아 접경지역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이민자들(Korean Diaspora)이 남북한 통일경제를 위한 배후기지로 이 지역을 중립적인 자유무역지대로 거리낌없이 투자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문호를 대폭 개방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6자 회담을 통하여 북한 핵 문제가 풀리고, 그런다음 북한의 전면적인 경제개선조치와 더불어 두만강유역 일대에 중국식 경제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FTA(자유무역협정) 수준의 다자간 국제경제자유구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면, 환동해권 경제개발 및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을 위한 주요 거점으로서 중국의 변방인 이곳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제 세계역사 앞에 숨겨진 보물의 진가를 발휘하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압축 경제성장을 해 온 중국의 경제발전과정을 중국특유의 연안(沿岸)경제개발 유형으로 정리해 보면, 기초단계로서 홍콩과 연계된 심천,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주강(珠江)경제권, 그 다음 2단계로 상해, 저장(浙江)성, 장쑤(江蘇)성을 중심으로 한 장강(長江)경제권, 그리고 최근 후진타오 정부가 주력하고 있는 대련, 천진,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발해만(渤海灣)경제권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중국의 경제발전과 국력 신장의 단계가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닐것이다.

여러분들, 고개를 들어 중국 지도를 한번 일별해 보라.
큰 닭 모양을 하고 있는 영토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 어떤곳인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중공업이 가장 발달했던 자원보고지대이며, 또한 북방 군사안보전략지로서 러시아 시베리아 및 몽골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동북3성(東北三省), 내몽골지역이 바로 그곳 아닌가?

또한 그곳은 남쪽으로 한반도와 직접 접속되어 있지 않는가.

그 넓고 중요한 산업, 경제, 군사 전략지역을 배후지로 삼아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강이 무슨 강인가?

바로 두만강 아닌가!

중국 정부가 UNDP의 두만강유역 개발사업과 함께 동해로의 출해권을 얻고자 북한, 러시아에 줄기찬 협상을 벌리고 있는 현실도, 바로 이곳이 중국 동북지역의 물류 및 경제발전을 위해 사활이 걸린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서부내륙 개발과 함께 중국 국가장기발전전략의 마지막 단계인 제 4섹타(SECTOR)지구로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중추구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고, 주(州) 수도인 연길시(市)가 핵심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그곳 동쪽 어귀에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소하룡(小河龍)이 있다. 그리고 이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문화를 공부했던 「민박회」회원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유서 깊은 천년송 고수 삼태송(古樹 三胎松) 그루터기에 앉아 미래를 관망하여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성터가 남아있는 이곳 연변 땅이 정녕 중국 동북지역의 발전과 남북한 통일경제를 아우르는 시범구역이 되고 나아가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을 위한 환동해 경제권의 GATE & HUB로서 자리매김 한다면, 이곳이야 말로 뉴 실크로드 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시작하는 관문지대가 되기에 합당하다.

시베리아 극동지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대륙과 북태평양을 연결하는 북위40도상의 중개기지로서, 이 지역을 통관하는 도도한 물류의 흐름이 동북3성(東北三省)을 지나고 북경을 거친 후 우루무치와 알마티를 통과하여 마침내 동서양을 연결하는 관문도시인 이스탄불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21세기 실크로드 문명의 대 부흥은 아시아의 차원을 넘어 유럽과 세계를 퓨전(Fusion)하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대하룡(大河龍) 프로젝트라고 이름지어 불러도 좋을만한, 다가오는 미래의 세계, 그 새로운 천년의 꿈을 거듭나게 하는 'Future Vision'이 내 마음속에 차오르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트오는 새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오, 역사는 서쪽으로 흐른다. 하나님, 이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동역할만한 사람들을 붙여 주십시오. 흩어져 있는 변방 소수민족들이 함께 교류하며 뜻을 모아 이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신 노마드운동의 일꾼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일에 민박회가 쓰임받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새벽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갔더니, 「민박회」회원들이 모두 일어나 저 마다의 아침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몇 명은 마을 산책을 나가기도 했고, 또 몇 사람은 방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운기조식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분은 마당에서 우슈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되시는 박기식(朴基植) 선생께서 마당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어제 밤에 미리 부탁해 두었지만 한번 더 확인했다.

"선생님, 아침식사가 끝나는대로 곧바로 출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식사 준비도 다 되어 있습니다. 이 회장님께서 먼저 식사하시지요. 다른 분들은 시간이 많다고 해서 천천히 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호텔까지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오늘 12시 30분 비행기로 연길을 떠나게 된다.

민박회 일행들은 저녁 비행기나 기차로 각자 임지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주방에서 독상으로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마친 후 바쁘게 짐을 꾸렸다.

그동안 「민박회」팀들과 어울리느라 다른 볼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오전중에 몇 분들을 만나서 업무 처리를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다.

나는 인생을 왜 이리 바쁘게 살고 있나 싶다.

그러나 마음속에 갈등이 있거나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모든 일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친구들이 가끔, 넌 돈도 안 생기는 그런 일을 왜 하고 다니냐고 물을때가 있다.

연변과기대 운영과 평양과기대 설립, 그리고 CBMC 사역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건 내 사명이야"라고 대답하고는 씩 웃는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주인되시는 박 선생님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회장님은 사명자이시군요"

그렇다. 나는 동북아공동체사역을 위한 일에 자부심과 함께 큰 사명감을 느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올해 11월경에 평양과기대가 개교할 예정으로 있는데, 이제 학교가 개교되면 한·중·일 지식인들과 기업인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한 마당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가 이를 위해서 기초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때 나는 「민박회」회원들이 통로가 되어 중국내 소수민족들이 중국뿐만 아니라 북한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폭넓게 교류하면서 이 시대, 동북아시대의 새로운 비젼과 대안을 위해 협력하는 일이 있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드디어 일행들과 헤어질 시간이 왔다.

나머지 뒷일을 전신자 교수께 맡긴다고 부탁을 드린 후, 손춘일 원장과 함께 두분의 손을 굳게 잡고 어제 '홍기촌'을 다녀온 이후 가졌던 내 생각을 전했다.

"여기 소하룡 마을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손 원장님께서 정년퇴직 후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계신다는데, 내가 한가지 건의를 하겠소. 이 마을 앞에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류하는 강 어귀에 조선족 수전사(水田史) 박물관을 하나 세우도록 해봐요. 전 선생님이 박물관 일을 잘 알고 계시니까 많은 도움이 될 꺼예요. 만일 손 원장님께서 뜻을 정하시면 나도 이 일에 함께 동참하겠습니다. 이건 어쩌면 우리 민박회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한번 계획을 세워 보세요."

얼마 후 마을 산책 나갔던 분들이 다 돌아오고, 주인되시는 박 선생님의 승용차에 짐을 다 실은 후, 나는 마당에 빙 둘러 모인 일행들을 둘러보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연변과기대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늘상 내가 잘하는 제스츄어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세운 다음 팔을 가슴 앞으로 쭉 뻗는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눈을 직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할 수 있어. 우린, 해 낼 거야. 그리고 널, 사랑해"

나는 「민박회」회원들에게도 팔을 뻗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라고 가르친 다음, 큰소리로 따라서 외치라고 주문했다.

"민박회여, 영원하라. 우리, 할 수 있습니다. 우린, 해 낼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나는 그들을 한분 한분씩 내 가슴에 꼬옥 껴안아 주면서 다시한번 속삭였다.

"사랑해요. 우린 친구입니다. 다시 만날때까지 잘 있어요."

눈에서 눈물이 난다.

가슴속 깊은 심연에서부터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런가 하면, 나는 이 순간 정말 너무나 행복했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격체요. 생명을 나눈 한 가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주인되시는 박 선생 내외분들이 아침 일찍 교회를 가셔야 된다고 하면서 그들의 승용차로 나를 8시까지 연길시내에 있는 국제호텔로 데려다 주셨다.

박 선생님은 대학에서 미술(서양화)을 전공해서 개인전도 여러번 열었고, 또 그사이 시집을 3권이나 내신 경력이 있으신 분이다. 우리 연변과기대 건축과에서 다년간 색채학 강의도 하셨고 연변일보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하신 분이다.

그런 경력보다 더 내 마음에 가깝게 여겨진것은 그 분들이 신앙인으로서 일터(한정식당)를 통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남들을 섬기는 일에 충성하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진실된 기독실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에 좋았다.

그것은 어쩌면 신앙보다 더 깊은 사랑의 능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8시 10분전에 호텔 커피숍에 도착한 나는 짐을 프론터에 맡겨놓고, 천천히 업무파일을 꺼내 한 장씩 들춰봤다.

8시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상무국 이용남 실장을 만나서 8월 29일 예정인 동북아 미래포럼 국제세미나(주제 : "동북아물류체계 및 두만강유역 발전전망") 준비 업무를 협의해야 한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가 공동주최하는 국제세미나를 연길 국제박람회 기간(8월 28일~30일) 중에 개최하기로 합의 되어있다.

9시에는 이 세미나 발표자인, 연변대학 경제관리학원 현동일 원장을 만나 발표 논문내용 및 자료집 인쇄건에 대해 업무 협의를 해야 한다.

10시에는 연길담배제조창의 김홍천 부사장을 만난다. 그동안 코웰(주)이라는 회사에서 담배 피울 때 나오는 CO를 줄이는 촉매제를 개발해 왔는데, 이 일에 대한 최종적인 기술검토와 이를 첨가한 담배의 북한 제조계획 및 한국 반입(통일부 허가사항)과 판매업무 전반에 대한 업무 협의를 해야 한다.

나중에 영업 수익이 발생하면 연변과기대를 지원하는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채택하기 위해 미리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나서, 11시에 호텔을 떠나 11시 30분까지 연길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나면 12시 30분 비행기로 거뜬히 출발할 수 있게 되리라.

그렇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1990년 가을, 우연히 북경에서 한 분의 크리스챤 지도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해서 나는 지금 여기까지 달려 왔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열린 3박 4일간의 민박회 모임을 통하여 또 한번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 크게 눈을 뜨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역사의 서진화 현상에 대해 매우 실감나는 인식과 사고의 확장을 체험했고, 그리고 그것이 21세기 동북아시대를 통하여 거듭나는 천년의 꿈으로 내 마음속에 뚜렷이 자리잡는것을 깨달았다.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길이 뚜렷이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순례자의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고난과 역경을 동반하는 새로운 꿈과 희망의 길이 될 것이다.

(끝)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글 싣는 순서
Ⅰ. 민박회
Ⅱ. 경희궁의 밤
Ⅲ. 백두산 소수민족 올림픽
Ⅳ. 올림픽 이후 중국의 과제
Ⅴ. 흐름의 미학
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
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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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everest8848
날자:2008-11-14 13:25:23
....청조말기 광서(光緖) 30년(1904)과 광서 32년에 전후하여 조선 함경북도 명천 밀양박씨(明川密陽朴氏) 박중근(朴重根)형제, 길주 양천허씨(吉州陽川許氏) 허웅범(許雄範)3형제가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노송을 발견하였다. 그 후 명천, 영안, 길주, 화태군 등에서 박씨, 허씨 몇호와 리씨(李), 김씨(金), 강씨(姜)가 몰려왔다. 民國 18년(1928)에 이르러 80여호의 큰 마을 하룡촌(河龍村)이 중심 마을로 되고 신룡갑(新龍甲)이라 하였다. 그 당시 국자가로 이루어진 연길시 근처(연길분지)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박씨, 허씨들의 마을이었다.... 우의 력사적서술은 과학적인 론리가 성립되지 않거나 모호하다. 하룡촌(河龍村)은 후에 있은 지명인데 로송이 있는 곳은 새전령이고 강건너기전 마을은 하동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골프장 넘어 과거에 계림(관청매)이라 마을이 있었다 .그 가운데 새전령은 제일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은 연변지명에 대한 깊은 연구없이 한국식 나름으로 풀이하거나 한두마디 얻어들은 것으로 요란하게 해석하는 습관은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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