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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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부부
2011년 12월 07일 10시 38분  조회:6171  추천:9  작성자: 김희관

“어머님은 나를 음악의 길로 이끌어주신 계몽자이시다.” 작곡가 최창규선생은 60여년의 음악인생을 회고하면서 수많은 사연들이 영화처럼 떠오른다고 하면서 그중에서도 자신을 음악의 길로 이끌어주신 어머님이 고맙고 그립다고 했다.

 최창규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해방전 우리는 왕청현 배초구에서 살았다. 어머님은 농부의 안해이고 네 아들의 엄마였다. 내가 일곱살인 해 어머님이 한동안 백로지에 풍금건반 문양을 그려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풍금연주 련습을 하시였다. 하루는 내가 어머님을 따라 성당으로 갔다. 어머님이 한복차림에 정중히 앉으셔서 나를 위해 풍금을 연주해주셨다. 어머님의 풍금소리는 나의 어린 가슴에 음악의 꿈을 심어주셨다. 1948년 어머님이 나에게 독일제 바이올린을 사주시여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년후 하루는 어머님께서 풍금을 치시고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설픈 연주였지만 참으로 평생 잊지 못할 모자의 2중주였다.”

 최창규선생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이시고 연변가무단의 중견작곡가이시다. 그는 가곡 “친구의 노래”, 가극 “아리랑”(합작), 명상곡 “봇나무”, 무용곡 “군민의 정”, “벌목공”, “분배의 기쁨”, “푸른숲 설레이네”,“처녀지” 등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여 연변가무단의 무대를 빛나게 했으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게 했다. 

 일전에 필자는 최창규선생과 일문일답의 대담을 가졌다. 아래에 그대로 정리하여 올린다.

 “선생께서는 여러 작곡가, 연주가, 성악가, 무용가들과 어떤 관계속에 살아오셨는지요?”

변가무단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무대예술표현단체이다. 우리 작곡가들은 연변가무단의 무대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게 하는것을 공동한 천직으로 생각한다. 지난 세기 90년대 작곡가 안국민,최삼명,허원식과 저희가 공동으로 작곡한 가극 “아리랑”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극 “아리랑”의 모티브는 우리가 공동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각자 맡은 악장에서 충실히 발전시켜 완전한 가극음악을 창조해냈다. 전국가극콩클 평의에서 “연변가무단의 작곡가들은 가극 ‘아리랑’음악창작에서 합작과 창조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나의 창작작품이 연주가, 성악가, 무용가들에 의해 빛을 뿌리는데 내가 어찌 그들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협찬을 하지 않겠는가? 사실 무대예술은 종합예술이기에 여러 예술가들의 공동한 노력이 없으면 성공할수 없다. 

“선생께서는 민족음악과 서양음악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민족음악은 작곡가의 터전이고 근본이다. 어떤 작곡가든지 모두 본민족의 음악에 귀를 기울려 그것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외국음악의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더욱 찬란하게 발전시켜왔다. 로씨야의 위대한 작곡가 글린카와 차이꼽스끼는 모두 로씨야민요를 바탕으로 위대한 음악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음악의 앞날에 대한 소망은?”

60여년간 우리의 민족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세월은 해와 달 같이 길고 음악은 세월과 함께 살아간다. 하기에 민족음악은 갈길이 멀고 멀다. 우리는 몇수의 가곡과 무용곡, 기악곡에 만족할수 없다. 앞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는 음악인재들을 많이 키워내여 민족령혼의 승화와 진보를 위해 더욱 훌륭한 가요,무용곡 특히는 기악곡, 교향곡을 창작해내야 할것이다. 

“선생께서는 음악가 부부 인생을 살아왔다고 들었는데요?”

1957년, 연변예술학교 제1기 입학생들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입학등록을 하는데 나는 한눈에 한 녀학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본인은 물론 모르는 일이였다. 1961년, 주덕해주장님과 연변가무단의 배려하에 나는 중앙음악학원 작곡계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다. 1964년 가을, 졸업후 우리는 결혼했다. 그 때 부인은 첼로연주가가 되여 연변가무단 악단에서 나의 창작작품을 기다리고있었다. 부인 리가자녀사의 말이다. “연변가무단에서 남편과 함께 했기에 그의가 창작한 작품을 연주할 기회가 아주 많았다. 남편이 집에서 며칠밤을 지새우면서 알심들여 창작한 작품이 악단에 교부되여 연주를 하게 된다. 그때마다 악단 지휘나 연주가들이 ‘이 작품은 잘 썼다.’고 찬사가 터질 때면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때론 ‘이 작품은 시원치 않다.’는 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안무가와 의견이 생기면 나는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금할수 없었다. 그래서 종종 조언을 할 때가 있었다. 우리는 음악의 터전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한 음악부부이다.”

“선생께서는 제2인생을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음악은 내 령혼의 메아리이다. 우리는 은퇴후에도 음악부부 인생을 살고있다. 제2인생에서 음악의 컴퓨터시대를 맞아 다행이다. 10여년전부터 음악창작과 음악저작을 위해 미디(전자음악제작)와 노테이션(전자악보제작)을 배웠다. 지금은 내가 창작한 작품들을 컴퓨터작업으로 정리하고있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음악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 물론 나의 제2음악인생은 안해의 내조가 있어서 더욱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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