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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누구를 위해 달리나?
2016년 07월 18일 18시 50분  조회:4692  추천:10  작성자: 최균선
                             붓은 누구를 위해 달리나?
                              
                                
    글은 누구를 위해 쓰느냐? 하는 문제는 진부할수 있지만 누구를 보이려고 쓰는가 하는 문제는 벌써 그 저의가 달라서 문인의 영원한 화제가 되지 않을가싶다.
    글을 쓰는 리유는 사람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를것같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자신의 기분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글을 팔아 푼돈이라도 쥐기 위해, 자신이 학식상, 문필상 뛰여난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그냥 다른 취향이 없으니까…아무튼 류류별별이요 각양 각색일것이다.
    글이 자신을 리해하여줄 미상의 독자와 속삭이고 하소연하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글에 담긴 진실은 오직 성스러운 열독행위에서 가치를 실현다고 믿기에 그렇게 피나는 심혈을 몰붓는것이 아니랴!
    독자들은 자기는 쓸수 없으니까 작자의 립장에서 독해하려고 할대신 선입견으로 무엇인가 흠집을 찾아내기 좋아한다. 자신은 상상할수 없는 엉뚱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사로잡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소일거리로 읽는다. 그러나 표준은 높아서 어디까지나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글은 자기 감수를 쓴다고 일러왔다. 자기의 고백이 되고 스스로 독자가 되는 일기도 열심히 진실하게 쓴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은 자기 감각, 내지는 감수를 쓰지만 우선 독자, 사회를 상대로 표현하려는것이므로 그저 열정으로서가 아니라 고심 참담한 경영의식을 선행시키지 않을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붓은 왜 들며 미약하나마 붓의 힘을 어디에 실어주는가 하는 문제인데 바로 창작목적, 사상의 경향성에 소급되는 문제가 되겠다. 역시 글이라는것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무시할수 없는 얘기이다. 붓이 칼보다 더 강할수는 없다. 글이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이라고 말하는것은 매우 아득하고 신뢰하기 어렵고 위태로운 말이다. 그것은 글을 쓰는 자들의 절망적인 답답함이다. 무기가 세계를 개조한다. 미국의 무기는 오늘 아침도 이 세계를 정확하게 때려부셔가지고 개조해 버린다. 그 개조의 방향이 옳든 그르든간에 그네들의 리익에 맞게끔 세계를 개조하려 한다. 지금‘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소통의 문제는 무시못한다. 부당한 현실을 상대한 싸움의 일종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 저항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그나마 지금과 같은 정도의 리성적인 사회가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생각해볼수도 있다. 인간은 물론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적리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성찰적리성도 역시 지니고 있어서 그걸 토대로 부당한 현실을 상대로 한 싸움을 계속해나갈수밖에 없는것이고 글쓰기 작업도 그런것의 하나일수 있다.
    개인과 사회는 어떻게 소통하는가? 글은 작자의 소일거리보다 모종 자각을 앞세운 마음의 소리로서 울리고 송가보다 폭로와 비판성으로,강음으로 메아리친다. 명철보신에 의견이 숨겨지고 복무성에 목매여 사실과 표현은 그렇게도 다를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여 언어의 소통기능은 오래동안 창백무력해졌다.
    90년대 이후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가 고창되다가 사인화창작경향이 성행되여 급기야 일종 창작풍조로 되였고 그에 뒤질세라 우리 민족문단에도 류행되였는바 그 부류의 창작자들의 자리매김을 의미하게 되였다. 사인화창작경향을 제창하거나 실천하는 작자들은 자아표현의 진실성을 중시하고 실천한다. 그런데 그 자아표현의 내함은 어떠한가? 기실 자아표현이란 일종의  환각이고 진정으로 표현되는것은 하나의 의식형태화한 “공공인(公公人)”에 불과하다. 자아본신은 이미 의식형태화된 모종 언어행위의 구성물로서 문학으로 말할 때 소위 진실한 자아란 줄곧 거울속에 꽃이나 물속에 달과 같아서 볼수는 있어도 눈섭사이에 잡아둘수는 없는것이다.
    문학의 “귀족화”는 창백한 문학을 낳았다. 문학이 인성을 표현하는것이 제일 선택이라해서 문학정신이 결석해서야 되겠는가? 어떻게 쓰는가 하는데는 작가개성을 핵으로 한 개인화가 가능하지만 무엇을 쓰는가 하는데는 개인화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유의 무의식이란 의연히 유의식이며 모든 유의식은 현실적존재에서 온다.
    인간이 사회성을 회피하면 인간의 정신적추구를 회피하는것을 의미한다. 물론 문학이 생활을 간섭하기엔 너무나 무력하고 사회전환의 총체적가치함량에서 의의가 약화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은 근근히 개인체험의 심리표백이고 개인정서의 발로에 불과한것으로서 생활에 대한 해석을 책임지지 않으며 더우기는 문제에 해답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한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 나간것이 아닐가?
    지금에 와서 문학은 리념의 설교가 아니고 철학의 발휘도 아니고 더우기 정치의 도해 혹은 재방송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은 무엇도 아니며 문학이란 곧 문학이라고 하면서 련인에게 련애편지를 쓰고 정담을 토로하는식에 만족한다면 근원적으로 문학의 본연을 떠난것이 아니겠는가?
    문학창작이 개인화를 표방하면 필경 시정생활의 늪에서 자맥질하게 되고 자연히 단조롭고 무료한 자기 중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것이다. 그렇게 쓴 글은 눈앞에서 곧 사라질 연기의 운명을 면치못할것이며 작가로서의 단명을 면할수 없을것이다. 기실 크게 웨치고있는“초월”은 실제상 생활에 대한 도피이며 자기사명의 철저한 상실의 분식된 표현이다.
    문학이 공농병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말이 극단으로 나아가 정치도구로 전락했다는 의미에서는 력사의 뒤안길에 락엽처럼 묵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문학이 의의로운 사회적활동일진대 지성적인 문인의 붓은 의연히 사회약세군체ㅡ민중을 위해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싶다.
    붓장난은 자기 감각에 따라 나름껏 놀아도 되겠지만 붓의 공리적력량은 언필칭 이 사회의 진보와 민중의 켠에 서야함은 당연한 리치이다. 력대의 문단사를 일괄하면 승리자을 위한 송가를 엮기 위해서는 필력을 자랑하는 붓대들이 수풀처럼 운집했지만 실패자, 약자를 위해서 붓대를 꼬나든 문인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아마 이런 실태를 두고 어느 지성인이《중국에는 종래로 실패한 영웅은 적고 끈질긴 반항이 적으며 악전고투하는 문인이 적고 반역자를 위하여 통곡하는 조문객이 적으며…이길징조가 보이면 모여들고 패할징조가 보이면 분분히 도망친다.》고 질타했을것이다.
    현시대 우리 문인들의 붓대는 강자의 켠에 세워야 하는가? 아니면 약자들의 켠에 세워야 하는가? 흔히 실화문학을 보면 기업가나 명인, 영웅을 위해 기념비를 세워주는것이 례상사였다. 물론 새 시기 중국문단에 로동대중의 하층생활을 파헤치고 그네들의 희노애락을 그린 훌륭한 작품도 있고 사회의 비리로 하여 생긴 진실한 인간생활을 적라라하게 폭로한 작품들도 용약 뛰쳐나온것은 사실이나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의 결과 붓대가 자아감각의 상아탑속에 풀피리가 된것이 기본경향이다.
    만약 붓대가 승리자의 뒤에서 승리하게 된 영명함을 해석하거나 승리자를 따라 부채춤을 추면서 승리자를 신단에로 떠밀어올린다면 그것은 붓의 비애이고 수치가 아닐수 없다. 그런 붓대는 인류문화사에 어떤 가치있고 의의로운 기록을 남길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붓대는 비루하게 무릎을 꿇는자의 생존의 도구일뿐이며 그 임자는 승리자의 어용문인에 불과하다. 그런 문학은 권세가의 앞에서 꼬리치는 애완 물에 불과하며 세상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오락에 불과하다.
    정교하지만 눅거리화환을 엮어 승리자를 기쁘게 하는것은 얼마나 쉬운일인가! 우리의 붓대는 사회최하층에 민간에, 이 사회의 변두리인들의 켠에, 아무것도 없는 민초들켠에 세우고 그들의 운명을 두고 울고웃고해야 한다. 오직 그들을 위해 진심된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고 피와 땀으로 진실을 반죽할 때 붓은 응유의 힘을 얻는다.
     붓대는 사람이 잡지만 독립적이다. 그것이 의뢰성에서 벗어나 밤길을 걷더라도 별빛을 따라 걷는다면 자기가 나갈 방향을 찾을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마땅히 만백성의 감수를 감수해야 하고 만백성의 기쁨을 기뻐하며 만백성의 희노애락을 쓰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 문학의 꽃이 대중이라는 옥토에서만 피고 향기를 풍길수 있다는 간단한 도리에 반기를 들사람이 없을줄 안다.
    문학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기에 걸음걸이가 무겁다. 문학은 그러한 본래의 걸음걸이로 균형과 무게를 유지해야 한다.   문학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느냐? 평민백성을 위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히 제기될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문학이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상아탑속에 무병신음이 될것이다. 문학의 꽃이 과연 누구를 위해 피여야 하는가? 두말 할것없이 국가, 민족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인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오직 민족과 인류에 무해한것이면 존재할 자격이 있으며 그와 반대라면 두절되여야 한다. 평민문학은 물과 같고 사관문학은 불과 같다고 옛날 문인들이 평한바 있다.
    국가와 민족과 사회인생을 놓고 말하면 문장은 거울과 같은바 하나는 정면을 비출수 있고 다른 하나는 뒤면을 비출수 있다. 량자가 병존해야 더욱 전면적으로 자기 진면모를 비출수 있다. 문학의 꽃은 아름답다. 인류가 절멸되지 않는한 문학의 꽃은 따스하고 정많은 가슴들에 고이고이 필것이다.
    작가는 독립사력이 강하여야 한다. 시대류행에 붓좇아 서양의것이면 그저 진리 이고 진품인듯이 이 리론, 저 리론을 닥치는대로 읽고 피상적으로 신장시켜려는것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한우물을 파서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때 비로소 좋은 작품을 낼수 있다. 이것은 문학뿐만아니라 우리네 삶 모든 방면에 해당되는 진리일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문학가치가 소실되는것이 아니라 세기와 더불어 그 생명가치를 과시하는 문호들의 작품을 과연 사명을 다한것이라고 말할수 있을것가?
    《문학을 고독한 백조의 마지막 노래에 비유하곤 한다. 모든 새가 칠흑같은 시대의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우아한 백조처럼 홀로 고독하게 최후까지 어두운 밤하늘을 비상하여 모든 새가 나아갈 방향을 제공하는것이 바로 문학이다.》  
    미운 새끼오리가 돼버린 현재의 우리 문학이 다시 화려한 백조로 부활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어째서 붓을 들었는가를 확정해야 한다. 문학에 대한 넘쳐흐르는 열정과 자부심으로 평생 글밭을 가꾸어온 지성의 작가들이 부르는 고독한 백조의 노래는 결코 흘러간 옛노래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아감각에 만족해 있을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문제의식이  없는것을 자각조차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아니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문제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아니라고 남을 훈계할수는 없지만 말이다.
    글에서 문제의식이란 가시가 돋친것을 의미한다. 그 가시가 대화의 주제가 되여 책을 사볼수 있는 여유와 자금과 지식이 있는 자들을 찔러 그곳에서 나온 피가 보통 의 약지자들에게 정신적인 수혈로 되여야 한다.
   보통의 약지자들란 소위 강자로 이 사회를 리드하고 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왜 힘겨운가, 힘겹게 하는 구조에 대해 의문을 가질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 구조에 대한 물음대신 힘겨움을 숙명처럼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다. 그 물음을 작가들이 이끌어내고 대답을 주어야 한다.
    금전만능주의에 절어든 사람만이  강자의 삶으로 선망되고 있는 세상에서 진정한 작가가 취해야 할 몸가짐은 어떠해야 할가? 비판적사실주의문학이 물리적폭력에 저항한 문학이였다면 21세기 사실주의문학은 더 치명적인 금전폭력의 비리성을 고발 하는 저항하는 문학이여야 할것이다.
   작가는 힘이 없고 돈이 없다는 리유만으로도 소박한 삶과 꿈이 깨여지는 삶을 살아가는 약세력들을 위해 글로써 성원해야 한다. 자본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자본가의 가방 든든한 빽이고 자본가는 정치권력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다. 그래서 다시 리얼리즘을 생각한다. 진정한 리얼리즘정신이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문학인가?
    그나마 있는 그대로의 현실조차도 외면하는 문학이 문학의 모든것으로 되여있는 오늘인지라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문학이 리얼리즘문학이 될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리얼리즘문학이란 완강한 현실이라는 표피를 뚫고들어가 현실의 리면에 감춰진 진실을 캐내는 문학이라야 할것이다.
    자고로 자기들만의 리익을 위한 장치들을 법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좋아하는 배부른자들의 토대를 뿌리부터 흔들수 있은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이였다. 숨길것도 없고, 에두를것도 없이 참된 아픔과 비애와 울분을 꼭 써야 한다면 용기의 부족에서 오는 일종 두려움이 생기리라. 
    글 자체가 그냥 삶의 모습이고 과정으로서 순간 순간 변화하는 삶 그 자체를 완벽한 모습이라 할수 없을까? 그렇다면, 우여곡절이 있고 파문이 이는 글, 그 자체가 완벽한 문학이라고 할것이요 붓대가 이룩하는 생명운동의 힘찬 악장이라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붓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붓글씨를 쓸때 가볍게 붓을 쥐고있는것 같지만 뒤에서 가만히 우로 잡아당겨도 쉽게 놓치지 않는 서법가의 그 붓대처럼 자기 의 필을 꼬나들자, 의로운 문인들이여!
 
                   2007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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