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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서 문체의 변이
2013년 02월 06일 09시 54분  조회:8735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수필문체의 변이

                                          최 균 선
 
     90년대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론이 고창되다가 사인화창작 경향이 성행했다. 그리고 급기야 일종 창작풍조로 되였고 우리 민족문단에도 만연되였다. 사인화창작경향을 제창하거나 실천하는 작자들은 모두 자아표현의 진실성을 중시하고 실천한다. 그러나 자아표현이란 일종 환각으로서 진정으로 표현되는것은 근근히 하나의 의식형태화한 “공공인(公公人)”에 불과하다. 자아본신은 이미 의식형태화된 모종 화어(話語)의 구성물로서 문학으로 말할 때 진실한 자아란 줄곧 거울속에 꽃이나 물속에 달과 같아서 볼수는 있어도 눈섭사이에 잡아둘수는 없다.
    사인화창작결실은 소설이나 기타 쟝르에서도 과시되고 있지만 특히 자아고백 문학이라는 수필창작에서 돌출하게 나타나고있다. 그래서 그런지 당전 문단정경을 보면 개인수필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다. 그야말로 수필마당은 하나의 커다란 “련병장”을 련상시킨다. 천군만마가 모여든 이 “련병장”은 성세호대하며 바다를 건너는 여덟신선이 각자 신통력을 과시하듯 수필창작자마다 나름대로 특장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다. 따라서 평론계의 눈길도 모아지면서 분분히 자기의 수필관점을 피력하고있는데 이는 문단 열점으로 되고있다. 이것은 좋은 현상이기도 하지만 너무 떠들썩한 소음과 붐비는 창작자들속에서 문제도 로출되고있다. 가장 돌출한 문제는 수필이란  간단하며 나름대로 쓰면 된다는 리해와 그에서 비롯된 창작실태이다. 오늘 많은 수필들에는 음양 실조되여있고 정신을 황홀하게 하는것 같으면서도 따지고보면 수필문체에 고정주소가 없는 느낌이 든다.
    사인화의 경향으로 나가고있는 수필창작에서 우선 제기되고있는 문제는 “자유”와  “약속력”간의 모순이다. 혹자는 수필의 핵은 “수의 (隨意)성”이라고 하며 심지어 “ 무엇이 생각나면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고싶으면 어떻게 쓴다.”는 정도에 이르렀다. “예술수필”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미문”을 내놓고 기타것은 진정한 산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주장대로 한다면 수필은 산만성을 불러오게 되고 허탈에 빠지게 되며 뼈대가 없게 되며 수필정신이 결여하게 된다. 후자의 관점대로 한다면 수필로 하여금 갈수록 자아봉페에로 나가게 되고 기개과 활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수필독자상실을 자초하게 된다. 기실 자유가 없는 수필은 멍에밑에 나귀와 같게 되고 칼도마우에 고기덩이와 다를배 없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는 수필의 자유를 쓰고싶은대로 쓴다는것으로 리해하는것이다. 가령 자유수필을 쓴다고해서 아무 문장구성법도 없이 일계렬의 감각을 라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철리성이라거나 의의, 주제사상을 외면하고 정서와 기분외에 다른것은 관계할것 없다고 한다면 수필정신은 지레 도망치고 말것이다.
   가령 재래의 언어규범을 무시해버린 상관없는 단어들의 퇴적이 된다거나 현실생활을 반영한다는것이 단순히 자기의 심령의 진실을 토로하는것이 된다면 수필은 어떤 모양일가? 설사 어떤 계기를 틀어쥐고 자기의 감정을 조작해 내여 오묘한 정서 세계를 그리고있듯이 수식한다거나 남이 다 체험하고있고 알고있는 인생일사를 짐짓 감동적이기나 하듯이 지리멸렬하게 라렬한다거나 제자랑 비슷한 어떤 경력을 지지 콜콜하게 서술한다면 수필의 매력이 나올수 있을것인가?
    수필창작에서 자유란 무엇을 쓰는가가 포괄될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어떻게 쓰는가하는것이다. 자유적수필이란 산간에 구름과 같고 계곡의 류수와 같으며 혹은 화간에 노니는 나비와 같고 창망한 하늘에 날아예는 수리개와 같다. 수필은 정치경제, 사상과 문화, 도덕 등 외재적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신의 속박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의 자유는 결코 제멋대로 하는것이 아니다. 한것은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란 없기때문이다. 수필창작은 어디까지나 모종 면에서의 제약을 받을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제약이란 곧 상식이고 공덕 등 자연법칙들을 말한다. 수필에서의 상식이란 정신의 응결을 의미하며 공덕이란 진실함을 의미한다. 수필은 비록 자아를 쓰는것이라지만 허위적인 조작과 가식은 금물이다.
    수필은 사람의 정감을 쓰고 사실을 쓰고 어떤 인생도리를 쓰는 등 삼라만상을 포섭하지만 천지간의 법칙을 벗어날수는 없다. 제약이 없는 수필의 자유창작은 필경 반면에로 나갈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어떤 문화수필은 자유에 대한 리해가 깊지 못하고 제약성을 모르고있기에 한갈래 혼탁한 흐름을 이루놓아 대뜸 싫증을 준다.
    기실 산곡간에 구름이라든가 류수, 나비, 창공에 수리개의 자유도 필경 제약성을 고유하고있는것이다. 자유의 실중은 수필창작에서 실중(失重)의 근원이다. 수필문체의 대소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리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수필”은 반드시 작은것을 보아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한낱 이불거죽이 되고 만다. “소수필”은 큰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물안의 개구리가 될것이다. 훌륭한 수필은 대해나 심산속에 묻힌 보물이나 한송이 꽃이 하나의 세계가 되거나 한알의 모래알이 팔소매속에 작은 세계가 되게 하여야 한다. .
    다음은 수필에서의 진실성과 허구성문제가 나서고있다. 시, 소설, 희곡 등 문체에서는 허구가 자체의 특성이라고 할수 있다. 수필창작에서 진실성과 허구성은 쟁론이 많은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은 진실성을 전제로 하기에 진실한 생활, 진실한 감정이 표현 되여야 하며 인물도 진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진실하지 못한 수필은 수필이 아니라는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국면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것은 표면적인 현실생활이 다가 진실하다고 보증 할수 없으며 수필은 어디까지나 예술이므로 현실의 국한성을 초월하여 예술적처리를 할수 있으며 허구로 창조할수 있다는것이다.
    시비야 어떻든간에 수필창작은 현실에 발붙여야 하고 현실과 민간속에 뿌리박고 민초인생의 고난과 불행을 반영하면서 그들의 심령의 대변인이 되여야 한다. 진, 선, 미는 수필마당에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꽃이 되여야 한다. 만약 한편의 수필에 이런것들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여있다면 그 수필은 글장난에 머믈고말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진실성을 편면적으로, 천박하게 리해한다면 역시 수필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말것이다. 진실이란 틀에 박힌것도 아니고 불가침범의 법규도 아니기에 허구성의 참여가 불가피한것이다. 진실성과 허구성은 음과 양, 오른손과 왼손 과의 관계와 같으며 영원히 분리되여있으면서도 통일성을 이루는 차길과 같다. 이처럼 수필에서 허허실실은 용허범위내에 두개의 존재이다.
    현재 가짜수필이 적지 않다. 제재도 허위적이고 인물도 가짜이며 표달방식과 언어도 가짜이다. 물론 어떤것은 진실한 인물을 쓰고있지만 심령의 감동이 없기에 독특한 개성과 견해가 부재하여 거짓된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날수 없다. 또 어떤 거짓된 수필은 깊은 사색이 없이 씌여졌기에 인생과 생명의 진실과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저 보기에 그럴듯한 빈둥지로 되고말았다.
    목각예술작품과 속사에서 “실”은 때로 “허”에 의거하게 되며 중국문인들의 그림에서 “무”는 곧 “유”의 일부분이다. 가령 퉁소가 나무막대로 되여있어 속이 비지 않고 규격적인 구멍이 없다면 퉁소라고 할수 없거니와 미묘한 선률을 뽑아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진실한 실체속에 빈마음이 남아있기에 대해같은 흉금속에 희로애락이 넘쳐나는법이 없이 평형을 유지할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래쪽에 있을수록 갈래갈래 내물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있게 되는것이다. 수필창작에서도 반드시 진실과 허공이 용납되여야 한다. 이속에는 내용과 형식등 방면이 포섭된다.
    문학은 자기 본연에로 돌아와야 한다고 대성질호하면서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필은 응당 정치, 도덕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활화, 인성화된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그로부터 수필은 그 자신의것으로 자족하면서 자아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수필은 “문학산책”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수필은 “로인문체”라고 한다. 이런 수필창작 관은 유모아, 한적함의 소요, 심령의 변연화상태를 보여주고있다. 반대로 현재 수필들은 갈수록 현시대를 탈리하여 무료와 자질구레한 일상에로 기울어지고있으며 화조월석이나 새나 벌레, 강아지와 고양이따위를 다루는데 그야말로 수필의 자살이라고 질타하고있다.
    이런 수필들에는 시대의 숨결을 들을수 없을뿐만아니라 인간생명의 약동감도 느낄수 없다. 물론 수필이 시대의 주선률이 될수는 없는바 이는 문체자체의 특성으로부터 결정된것이다. 이 시점에서 수필을 “변연문체” 혹은 “업여문체”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 작가적자세로 수필을 일반 문장으로, 혹은 수필을 정론문이나 신문글로 쓰려한다면 기필코 좋은 수필을 써낼수 없다. 만약 수필이 너무 이른바의 중심에 너무 접근하거나 아예 하나로 융화되여진다면 수필의 본성을 잃고말것이다. 하기에 로련한 수필가라면 시대와 너무 거리를 두지 않고 변연인의 시점에서 변연의 신분으로 변연심리상태에서 수필을 쓰고있다.
    그러므로 맹종하지 않으며 초조해해하지 않으며 공리에 구애되지 않고 류사성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청고한 심리상태에서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터득하면서 인류 사회의 도리와 심령을 파헤친다. 그러나 이런 창작심리상태는 결코 수필이 시대상에 등을 돌리고 자기의 상아탑속에서 문은 닫아걸고 수레를 만드는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처럼 무병신음하거나 제멋에겨워 뇌까리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취가 있고 재치있는 수필은 직접 시대를 반영하지 않지만 시대의 밝고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으며 시대의 맥박을 무시하지 않는다. 진정 훌륭한 수필은 시대를 포용하면서 시대를 초월한다. 또 시대를 초월하려면 심령의 빛으로 생활적인 시대를 조명해야 한다. 이런 립장에서 말한다면 변연상태에 있기를 원하는 수필가는 반드시 시대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해야 하며 인류심령의 건전한 발전의 제고접에서 자연과 인생을 쓰면서 “자아”중심을 체현해야 한다. 옛날 장자의 산문은 그 시대의 변연에 처해있었지만 그 시대를 무시하지 않고 아울러 “자아”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강렬한 심령의 빛을 반사하였다. 그의 이런 심령의 빛은 일체 어두운면을 투시하 였으며 인생, 생명과 인성의 심처까지 조명해보였다.
   한편 만약 수필이 시대의 메가폰으로 된다면 그 수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의 버림을 받을것이다. 시대와 민중의 광대한 배경이 없다면 수필은 온실속에 꽃처럼 비바람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져버릴것이 자명하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시대라는 이 크낙한 환경속에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여야 하는바 시대의 파동과 민중의 숨결로 호흡하면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생의 꽃이 피고지는 경상에 울고 웃어야 한다.
    수필자체로 말하면 그는 정신의 섬광으로서 안광은 거대한 횃불이 되여 인생현장을, 심령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춰보일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망망한 우주 공간을 가득채우고도 지구촌을 비춰주는 하늘의 빛처럼 생활의 지구를 비춰보여야 한다. 태양은 우주의 변두리에 있지만 누리를 비추지 않는가?
    수필창작에서의 변증원리는 찬연함과 담담함의 관계속에서도 체현된다. 한면으로는 변화무궁하여 마치 봄날처럼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다른 한면으로는 담담한 숲같고 무색무미의 맑은 물과 같다. 따라서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은 “비확정성”과 “창조성”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 어떤 모식으로 굳어져 버린다면 곧 메말라버리거나 죽어버릴것이다. 개인이거나 류파거나 조류라거나 할것없이 모두 같은 결과를 낳을것이다.
    수필은 단일한 정태적생명현상이 아니며 또한 단일한 동태적생명현상만이 아니라 호상 전화하고 호상 보충해주는 변증적통일관계에 놓여있다. 더 부언한다면 수필은 물과 같아서 고정된 모양이 없는바 어떤 그릇에 담기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한다. 사발에 담긴물은 사발모형으로 존재하고 병에 담기면 병의 모양으로 있게 된다. 자유로이 흐르는 강물도 긴 흐름상태이지만 추우면 얼어붙고 따스해지면 녹아내려 흘러간다. 나중에 바다에 흘러들어 창해일속이 되여지면 바다의 모양을 같게 된다. 이렇듯 변화속에서만 생동할수 있는 수필이다.  
 
                               2005 년 7 월  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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