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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먼곳의 작은절 -행자스님의 수행일지

먼곳의 작은 절 행자오능의 수행일지8-그때는 어느때
2016년 02월 23일 09시 57분  조회:2196  추천:1  작성자: 行者金文日
  산사의 단풍은 빨리도 진다. 울긋불긋 단풍을 구경할 사이도 없이 그냥 지여버린다. 단풍은 아름답지만 단풍을 구경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죽어가는 나무잎 일뿐이다. 살다보면 마음의 경지에 따라 인생의 환경과 경지가 변화는걸 느낄수가 있다.
오진에게 금강경 기본 장절을 외우도록 시키고 스승님이 떠나신 다음날부터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만 감기 몸살에 걸려버렸다. 병이란 그렇게 갑자기 오는듯 싶다. 아무 예고 없이 그냥 몸살이 나니 춥고 떨리고 힘이 없다. 코물 흐르고 목이 아픈것 정도는 참을수 있으나 온몸에서 열이 나고 힘이 빠질때에는 도무지 육신을 이길수가 없어서 끝내는 알아눕고야 말았다. 가르치려던 오진이 오히려 이럴땐 큰 힘이 되여서 병수발을 들어주었다. 내가 가르치려다가 한수 배우듯이 전혀 예견치 않던 사람한테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기도 한다. 예고없이 걸리는 감기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언젠가는 예고없이 끝날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런것을 모르고 있다. 예고없이 병이 오듯이 삶도 예고없이 끝남을 인지한다면 일찍부터 불법을 수지하고 따라야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지혜를 가진 인간은 오히려 많지 못하다.
  우리 절에는 감기약이 준비되여 있었지만 오래전에 사다놓은것이라서 그런지 유효유통기한이 지난것이였다. 유통기한이 지난것이라서 불안하여 먹지않고 버틸려고 했는데 며칠째 몸이 떨리고 아파서 젊은 청춘인 나도 육신을 이길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유통기한이 지난 약이였지만 그냥 먹었더니 어제부터 서서히 열이 내리고 안정을 찾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도 때로는 효과를 볼수 있는가 본다. (다른분들은 따라하지 마시길.^^)
약은 유통기한이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지혜는 유통기한이 없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욱 빛을 발하고 우리의 앞길을 비출뿐이다. 잠시 그늘에 가리울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빛을 뿌릴수 있는것이 불법의 지혜일듯 싶다.
벌써 열흘째 오진을 가르치지 못했다. 스승님이 와서 시험칠일이 걱정되여 오진을 불러서 금강경을 외우게 하여보았더니 제법 잘 외운다. 감독이 없었는데도 열심히 외웠나 본다.
  ‘금강경’ 제 일품을 보면 일시(一時)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금강경’을 처음 설법하실때 시간을 가르킨다.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지수급고독원에서 금강경을 설하셨는데 그때가 일시이다. 일시라는 말은 불교경전에서 많이 나오는데 우리 현대말로 풀이한다면 그때 그 시간에라는 말이 된다. 지금같으면 기원 몇년몇월몇일 몇시에 어디에서 어떤 주제로 누가 어떤사람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귀찮고 의미없는 것이였다. 긴 우주의 계보속에서 인간의 시간이란 하찮고 볼일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것이다. 거의 모든 불경에는 명확한 시간의 표시가 없다. 현재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양문화와 당시 인도와 교류했던 서양사회의 역사시기와 결부하여 불교역사을 추리할뿐 분명한 시간을 알아낸다는것은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금강경에서만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경전에서 나오는 일시(一時)라는 말은 그때 시간에라는 말이 된다. 약 17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동서양의 일부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서 비로서 인도 역사책이 만들어 졌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상세히 역사와 연대가 기록되여 있으나 인도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때에는 왕들의 역사일뿐이다. 왕국의 흥망성쇠와 왕들의 희노애락을 적은것을 우리는 역사로 배운다. 일반 백성들의 삶까지 다 적기에는 너무 부족한것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 다음으로 남은것이 야사이고 민간이야기와 설화같은 것이였다.  어떤 학자들과 스님들은 현재 인도나 스리랑카에 가서 힌두어나 고대 범문을 배워서 <진정한> 불법을 배우련다고한다.
그러나 알아야할것은 긴긴 세월동안 우리의 언어는 변화되여 오고있고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의 변화와 함께 모든 언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만 보아도 경상도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는 지금도 잘 알아들을수 없는 경향이 있다. 물론 지방마다 다른 사투리와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함경북도 방언과 남단의 제주도 방언은 서로 큰차이가 난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삼십년전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들은적 있는데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억양마저도 현대와는 천양지차로 느껴졌던적이 있다.
그렇듯이 현재의 범문은 17세기이후의 범문이고 우리나라 삼국시기 이전의 경전은 지금 거의 찾아볼수가 없다. 게다가 밀종에서 가르친다는 주문과 범어 역시 남인도, 북인도,동인도 서인도, 중인도 등 지역별로 전해져와서 발음과 표기법전부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그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다. 그런데 아직도 인도나 스리랑카, 혹은 네팔에 가서 진정한 불법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생각인것이다. 가까운곳에 있는것을 버리고 멀리걸 구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양인들 특히는 근대 영국인들은 인도를 식민지화하여서야 비로서 인도의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민지화된 인도의 문화를 부정하려고 하였고 그것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애를썼다. 그러나 인도의 문화는 마치 한장의 스폰지처럼 모든 문화를 흡수하고 동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천성적인 철학자들이였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배우기위해서 범문을 배운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간낭비일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삼천아승지겁의 긴 시간동안 천천히 불법을 찾을 시간이 있다면 그렇게 이 세상 저 세상 찾아다닐수 있겠지만 진정한 불법은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에 잘 보존되여 있는것이다. 그것만이라도 불법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중생에게 필요한것이 전부의 불법이 아닐지라도 금강경 한권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불도를 닦는 정신이다.  이미 불교가 쇠퇴하여 이교도가 가득차 있는 인도에 가서 말도안되는 범어를 배워서 불경을 배우려는  생각은 동양문학에 관한 박사학위를 미국에가서 따와서 국내에서 이름을 날리려는 어리숙한 학자들과 다름이 없다. 물론 범어도 어학중의 하나로서 어학을 배운다는 의미로서는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굳이 범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것이 내 생각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히려 중국어를 잘 배워서 옛날 우리말로 직역되여 알아보기 힘든 경전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풀이해 내는것이 훨씬 더 큰 공덕이 될것이다.
  어느 의사가 말하기를 치매에 걸리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상실한다고 한다.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간에대한 개념도 없다고 한다. 밥을 먹고도 먹었는지 모르고 저녁이되여도 오전인줄 안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그렇듯이 시간에대한 개념이 없었다. 비록 현재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가 실지 아라비아인들이 만든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만든것을 아라비아인들이 사용하다가 발견되여서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만 그런 위대한 숫자기호를 만든 인도인들은 시간에대한 관념도 숫자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던듯 싶다.
그래서 불경을 보면 거의 대개가 일시(一時)라는 말이 나온다. 즉 그때 그 시간에라는 말이다. 그때가 언제였나하면 바로 그때였다는것이다. 불교다운 용어이다. 무한한 우주와 그 우주와 함께 무한한 존재인 시간을 굳히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것이 불교다운 사상이다. 불교문학이나 서적들을 보면 쩍하면 팔만사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 팔만사천, 저기에 팔만사천이다. 서유기를 보면 십만팔천이란 표현도 많이 나오는데 손오공이 한번 곤두박질 하는데 십만팔천리를 간다고 한다. 인도인들의 팔만사천이란 말은 우리말로 굳이 표현한다면 엄청나게, 혹은 무지무지라는 말로 표현할수 있을듯 싶다. ‘무지무지 먼 옛날’에라고 표현하던가 아니면 ‘아주멀고먼 옛날에…’ 라고 표현할수도 있다. ‘호랑이가 담배피우고 토끼가 이야기하던 시절에…’ 하면 우리는 아주 옛날이야기구나하고 생각한다. 때문에 “일시”라는 그말 하나에도 깨달음의 뜻이 담겨있다.  “금강경”에는 “과거심불가득,현재심불가득,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있다. 시간은 상대적인것이고 영원한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 모두 버리라는 말이다. 시간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깨달음을 뒤로하게 한다. 불기요, 서기요, 기원이요, 기원전이요, 하는 모든것은 광대무변한 불법의 의미에서는 너무나도 무의미한것이다.
  몇일 앓아 누워있을라니 모든 일들을 오정과 오진이 맡아서 해주었다. 아파서 누워있는 나도 정말 하루가 삼추(三秋)처럼 길어보였다. 그러나 정말 불법에 도취되여 있을때는 몇달 몇일이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고 후딱 보낼때도 많았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은 상대적인것이고 한편 절대적인것이다.
  단풍을 쳐다보면서 느끼는것이지만 이런 단풍을 보는 ‘일시’를 인생에 몇번이나 경험할수 있을지 궁금하다. 서유기를 보면 수보리 조사가 손오공에게 도술을 가르칠때 산속에 온지 몇해 되였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손오공이 말하기를 가끔 뒤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하면서 온 산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 그 복숭아를 일곱번 실컷 먹었던적 있다고 고하는 장면이있다. 복숭아를 일곱번 실컷 먹었으니 일곱해가 지난것이다. 서유기에서 나오는 손오공에게 72가지 지살수(地煞數)의 변화의 방법과 능력을 가르쳐준 스승이 바로 수보리이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금강경’의 주인공 수보리인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조사(祖師)로 표현되여 나오고 또 도사인듯 표현되였지만 바로 금강경의 주역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부처님께 도를 물어주신 고마운 분이신것이다. 손오공마저도 그분의 제자이니 우리도 허심히 배워야 할듯 싶다.^^
  단풍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에 맛있게 복숭아를 먹고 아름다운 단풍을 구경하는 그런 일시가 대체 몇번이나 있을까 고민해보기도한다. 이 세상의 부와 권리와 명예를 다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一時)일 뿐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금강경’의 무언의 경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다고 하겠다.
이에 맞을듯한 게시(偈頌) 한편이 떠올라 적어본다.
 
길다고 하는것은 짧은것이 있기때문이고
무겁다고 하는것은 가벼움이 있기 때문이다
늙어간다는것은 청춘이 있었음이요
열매가 달림은 꽃이 피였음이라
저 늙은이 힘없다 웃지마소서
청춘도 일시(一時)고 힘도 일시라네.
 
과거에도 부처님은 그자리에 계셨고
현재에도 부처님은 함께 하신다.
미래 현재와 과거에는 내가 있고
어제 오늘 내일도 불법은 상재한다.
아픈자 약하다고 싫어마소서
건강도 일시(一時) 행복도 일시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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