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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먼곳의 작은절 -행자스님의 수행일지

먼곳의 작은절 행자오능의 수행일지5-오진의 도포
2016년 02월 03일 16시 09분  조회:1614  추천:0  작성자: 行者金文日
  오늘은 주지스님의 심부름으로 우리 절에서 가장 가까운 봉래마을(가명임)로 내려왔다. 오고가는데 몇시간씩 걸리고 교통 또한 불편해서 마을사람들도 우리 절을 많이 찾지 않는다. 거리와 교통이 불편한것도 있겠지만 마을 인근에 또 다른 사찰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봉래마을의 동북쪽 산골짜기에 <봉래사>(가명임)라는 아름다운 사찰이 하나 더 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사찰은 명당자리에 자리잡은듯 했다. 마을에서 얼마 멀지도 않고 길도 잘 포장되여 차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었다. 게다가 절 주변의 단풍나무들이 가을이면 그 빛갈이 짙어져서 여간 아름답지 않다. 가을의 향이 짙어지면 단풍 보러오는 선남선녀들로 북적이는 봉래마을의 작은 명소이기도 했다.
봉래사는 신도들도 꽤 있는듯 싶어서 정기 법회도 많이 연다. 우리 절 하고는 한마디로 천양지차다. 우리 절은 다니는 신도도 일년가야 이십여명정도고 그것도 주지스님이나 우리 스승님의 옛 도반들이 대부분이셨다. 봉래사 주지스님과 우리 주지 스님은 서로 가끔씩 서신이 오고 갔는데 우체국이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은 우리 같은 행자승들이 해야했다. 봉래사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거나 행사가 있을때면 꼭 우리 주지스님께 서찰을 보내오는데 주지스님이 그래서 절문을 내려가시는걸 나는 여직 본 기억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회신을 써서 보내는 정도이고 일년에 한두번 정도 우리 스승님이 내려가셔서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우리 넷중에서는 어린 오진을 빼고는 모두 봉래사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스승님이랑 참가했던적 있다. 그때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이번에 서신전하러 갈때 오진이 너무 따라가겠다고 졸라서 스승님께 허락을 구하고 데리고 나섰다.
봉래사에 우리 주지스님의 서신을 전하고 점심공양을 먹고 다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났다. 오진은 절 밖에만 나오면 뭐나 신기한듯 두리번 거린다. 하긴 나도 오진만한 나이때는 그랬었다. 요즘은 봉래마을도 좀 한산한듯한 느낌을 준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지나다니는 젊은이와 아이들을 볼수 있었는데 오늘따라 다니는 거리는 많이 썰렁한 기분이다. 가끔씩 길에 다니시는 분들을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직장 찾아서 더 큰 도시로 나가고 없는것이다. 
우리 절로 들어가는 길목에 이르렀을때 까만 고급승용차 한대가 우리 옆에 서더니 한분이 차안에서 합장하며 말을 건넨다.
“스님, 여기 봉래사 어떻게 갑니까?”
길을 물어보는것이다.         
봉래사 가는 방향을 알려주고 돌아서는데 그 차에서 한사람이 내리더니 합장하고 인사하며 물어온다.
“스님, 스님은 봉래사 스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요앞 남산사(가명)에 있습니다.”
오진이 앞질러 대답했다. 그분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아, 여기에 봉래사 말구도 다른 사찰이 있었나보죠? 그럼 왔던김에 스님들 절에 다녀옵시다.”
그분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사찰은 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암자에 가까운데 손님들을 모시고 간다는것은 무리였다. 일단은 차가 통하지 않는 산길이라 걸어서 올라가야 하고 빨리걸어서 두시간정도 걸리는데 요즘은 가을 태양이라 네시가 좀 넘으면 날씨가 어두워진다. 손님방이 전혀 없어서 손님들이 기거할 곳도 없다. 한번은 스승님을 찾아온 손님을 오공사형의 방에 모시고 오공사형은 어쩔수 없이 불당 한구석에 자리를 마련하였었는데 그때문에 스승님이 주지스님께 한참을 야단맞기도 했던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지스님은 손님을 별로 반가와 하지 않으신다. 우리 절이 커지지 못하는것은 그런 원인도 있다. 주지스님의 그 영향을 우리 스승님도 바로 전수 받아서 수행정진하는데 방해가 된다면서 법회도 열지 않고있다.
신도들이 많이 찾아온다면 절의 물질적인면에서는 보충이 되겠으나 수행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크고 작은걸 견주어볼때 조금 어렵더라도 조용히 정진하는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봉래사로 가보시라고 권고했더니 오히려 더 열성스레 우리 절에 가보겠다며 졸랐다. 늦으면 늦는대로 알아서 내려올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막을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냥 놔두고 오진을 이끌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뒤로 승용차가 따라 오는듯 하더니 얼마못가서 멈추고 말았다. 우리 절로 가는 길은 본래 수레가 다닐수 있는 길이였기에 옛날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차들도 다닐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마을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산에 올라와서 일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몇년새 길가에 가득 자란 싸리나무와 엉겅퀴 나무들이 이제는 길을 다 메우고 있었다. 한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작은 오솔길밖에 없고 그길도 비가 내리면 진흙으로 가득차서 두 발사이에 흙덩이가 들어붙어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게 된다. 하기는 요즘 이 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 절 사람들밖에 없는듯 했다.
뒤따라 오던 두 거사님은 한시간 정도 따라 걷더니 힘든듯 숨을 몰아쉰다. 구두를 신고온것이 후회된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잠간 멈추어서 그 거사님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서 무엇때문에 우리 절로 가려고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분들의 뜻은 이러했다. 요즘 경기가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오랜시간동안 사업이 부진하여 속을 태우고 있던중 그분의 어머님이 점치러 갔는데 그 점치는 사람이 이야기 하기를 봉래마을 부근에 절이 있는데 그 곳 절에 깨우침을 얻은  스님이 입던 도포자락을 조금베여 몸에 지니면 사업이 크게 다시 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봉래마을로 내려왔다는것이다.
 그분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수 있었기에 나는 오히려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내려고 했다.
“우리 절에는 깨우침을 얻은 스님도 없고 그냥 자그마한 암자일뿐입니다. 아직도 한시간 정도 더 올라가야 할텐데 그 시간이면 아예 봉래사로 다녀오시는것이 나을겁니다. 봉래사의 주지스님은 덕이 높으신 큰 스님이십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그 거사님 또한 고집이 셌다. 이런 깊은 산골 절속에는 반드시 덕이 높은 큰 스님들이 산다는 것이다. 웃음이 나갔지만 그냥 내버려 둘수밖에 없었다.
세속에서 부귀와 영화를 쫒는것은 뜬 구름을 잡으려하고 물속의 달을 건지려는것과 같은 행동이지만 사람들은 큰 스님의 도포자락을 잡으면 그 뜬구름을 잡을수 있고 물속의 달을 건질수 있을줄로 안다.
진정 발심하고 불도를 따르는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 성불하려는것이나 사람들은 세속적인 부귀와 평안을 찾으려고만 한다. 본말(本末-시작과 결과)이 거꾸로 된 선택인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그 거사님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맞습니다. 스님,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나이가 이미 오십이 됐고 어머님도 모셔야 하고, 아내와 자식들도 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 팽개칠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이다. 같은 피로 엉킨 사랑하는 권솔들을 버리고 입산 수도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할것이다. 내가 그분이라도 쉽게 결단을 못했을것이다.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깨우치려면 먼길을 걸어야 한다. 반야바라밀에도 친척 친구, 가족들이 있다. 그것이 육도(六度)이다. 육도윤회의 육도가 아니라 여섯가지를 넘어야 반야바라밀을 이룰수 있는 그 육도이다.  보시(布施), 지계(持戒),인욕(仁辱),정진(精進), 선정(禪定),반야(般若)를 이루어야 원만해진다. 이것을 수지하고 행하는것을 불교에서는 행원(行愿)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시를 행하며 어떻게 계를 지키며 어떻게 욕됨을 참으며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하며 어떻게 선정의 공부를 하여 그 결과를 몸소 이룰것인가하는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마침내 부처가 되는것이다.  반야의 그 앞의 다섯가지가 바로 반야의 친척과 친구들이다. 그 다섯가지를 수지하고 검증하여야 비로소 반야지혜에 이른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를 떠나서 출가하는 스님들을 비속하고 인정없고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족과 친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어찌 중생을 사랑할수 있으리오. 가족과 친지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더 큰 자비행을 실천하는것이 불도를 닦는 진정한 마음인것이다. 그것을 권속반야(眷屬般若) 라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우리절에 도착했다. 주지스님은 선방에서 예불중이여서 나오지 못하고 스승님만 나와서 맞아주셨다. 스승님은 나와 오진을 나무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와 오진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저녁 공양준비를 하는 오정스님을 돕는사이 스승님이 불러서 나가보았더니 두 거사님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공양을 드시고 가라고 해도 그냥 내려간다고 했다. 아까 올라올때 나의 이야기를 들어서 절의 형편을 알고 있는데다 정작 와보니 정말 자그마한 절에서 저녁공양까지 먹고갈 마음도 없나보았다.  벌써 산사에는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해졌다. 스승님은 우리더러 오진의 옛날 입던 도포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 거사님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잠간 어렸다. 오진이 아까 함께 산을 오르던 그 어린 동자중임을 알고 있는 까닥에서였다. 나는 옛날 오진이 입던 옷중 가장 낡은것을 창고에서 골라서 스승님께 건네주었다.
스승님은 그 옷을 정성들여 싸써 드리며 말했다.
“두분 거사님이 모처럼 우리 절에 오셔서 보시도 하시고 도움도 주셨지만 우리절에는 정말 득도한 스님이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절에서 제일 아무 생각없이 경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오진일것입니다. 아무 욕심도 바램도 없이 경을 읽지요.. 잘살게 해달라는 생각도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경을 읽는 오진의 도포가 영험하다면 아마 제일 영험할것입니다.”
그 거사님들도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더 이상 말못하고 그 도포를 받아 넣고 산을 내려갔다.
마침 옆에 있던 오공 사형이 물었다.
“스승님,정말 오진의 도포가 제일 영험한건가요? 그럼 오진이 크기전에 도포를 많이 사줘야 겠어요.”
그 말에 스승님도 빙그레 웃으셨다.
“너희들중 버릴 옷이 어디있느냐, 오진은 아직 어리고 한창 키가 크고 있으니 옛날 작아서 못입는 도포를 줄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말에 우리 모두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럼 그 거사님께 하신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않습니까?”
오정사형이 의아한듯 물었다.
“그게 어찌 거짓말이더냐, 너희들중 내가 보기에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비우는데는 오진이 첫째다. 비록 깨달음을 얻은 비움은 아니지만 우리절에서 누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수 있겠느냐. ”
“그럼 주지스님은요?”
오정사형이 다시 물어본다.
그말에 스승님이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오정의 머리를 탁 치신다.
“얼른 저녁공양 준비를 하거라. 주지스님의 몇벌안되는 도포를 그분들한테 주었다가는 우리 모두 절에서 쫒겨날거다.”
그말에 우리는 희희낙낙거리며 공양전으로 달려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스승님의 말씀에 도리가 있는것이다. 경전을 읽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내용도 느낌도 없이 그냥 중얼중얼 읽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겉으로는 경을 읽으나 마음속에는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찬 사람들 또한 있다. 득도한 스님의 도포자락으로 행운을 찾으려는 것이나 스승님이 오진의 도포를 주어보낸것이나 모두 방편일 뿐이다. 우리 스승님이 우리에게 법문을 강해(講解)하실때면 머리에 잘 들어오는데 주지스님이 법문을 이야기하시면 너무 심오하게 말씀하셔서 우리는 대부분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세미나나 강의에 참가하게 되면 강의 잘하시는 분들은 자그마한 사례하나 만으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해하게끔 만든다. 불경을 보아도 부처님께서 많은 비유를 들어서 제자들에게 그 뜻을 이해시키고 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마찬가지로 법문을 잘하시는 스님이 있는가하면 문자반야에 능통하신 스님들이 계신다. 법문을 잘하고 문장을 잘 다듬어서 법문을 듣고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환희심을 가질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중의 방편(方便)반야인것이다. 우리말에 더 가깝게 번역한다면 방법반야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얻는과정에서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 방법반야를 깨우친 스승님을 옆에모신 제자는 행운스럽기 그지 없다.
어떤 사찰에는 천수관음을 모시기도 하는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영험과 능력을 모신것같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뜻이 포함되여 있다. 한 사람에게 천수천안(千手千眼)이 있다면 그 능력과 신통력은 대단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보살행이란 대자대비의 마음이고 그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천수천안의 신통력과 같은 무수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방법반야바라밀이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다양한 분류로 나눌수 있고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수지하는 방법 역시 다양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득도하여 입적하시기 전까지 45년간 무수히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경전마다 사례와 이야기가 다르고 방법이 틀리다. 어느것이 맞고 틀린것이 없다. 모두가 맞고 모두가 틀렸다.
  반야바라밀은 그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또 구하기도 어렵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수지하고 인증하고 공부하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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