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3돐,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6돐을 맞이하는 을사년에 경건한 마음으로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토비숙청, 주구청산, 토지개혁, 참군참전, 전선원호의 제1선에서 주력군으로 활약하면서 동북해방전쟁, 나아가서는 전국 해방전쟁의 력사적 승리를 이룩하는데 뛰여난 기여를 한 조선족인민들의 업적을 돌이켜보노라면 그 감회가 새삼스럽다.
력대로부터 국민당에 대한 정통관념에 물젖지 않았던 조선족인민은 14년간의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의 행정속에서도 줄곧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불요불굴의 정신과 분진하는 민족적 기개를 떨치면서 력사에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한페지를 남기였다. 그러하였기에 중국조선족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후의 비교적 복잡한 정치환경속에서도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바로 잡고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동북해방전쟁과 전국해방전쟁에서 불후의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투항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항전의 승리로 하여 국내의 계급관계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즉 중국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인민대중과 미제국주의의 지지하의 대지주, 대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국민당반동파와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상승한 것이다. 일제가 무조건투항한 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지간의 투쟁의 초점은 어떤 나라를 세우며 어떤 정치제도를 실시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중국공산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보위하면서 평화롭고 민주주의적이며 광명한 새 중국을 건립하려고 한 반면 국민당반동파는 항전승리의 과실을 찬탈하고 대지주, 대자산계급의 리익을 대표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조선족인민은 바로 모택동주석이 항일전쟁승리 전야인 1945년 4월 23일에 발표한 〈중국의 두 운명〉이란 글에서 제기한바와 같이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이고 통일되고 해방된 새 중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다른 하나의 중국 즉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분렬된 빈약한 낡은 중국을 선택하느냐”하는 력사의 갈림길에 나서게 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1945년 8월 당시 동북의 조선족은 약 230만명에 달하였는데 주로 동만, 북만, 남만 등지에 크고 작은 집거구를 형성하고 생활하고있었다. 일제패망이후 국민당군의 ‘선견대’는 동북지역 조선족집거구와 연변 5개 현에 당지의 지주, 토호, 자본가, 관료 등을 중심으로 국민당조직을 세웠는데 연길에는 국민당 길림성당무판사처와 국민당 연길현당부 등을 설치하고 동북 여러 조선족집거구에는 토호, 특무,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치안유지회’까지 조직하여 국민당을 따르도록 조선족들을 선동하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있는 민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혁명단체와 조선의용군 그리고 후에 동북행정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설립된 연변전원공서는 조선족집거구의 특수상황에 비추어 많은 지방간부들을 기층에 파견하여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해방과 발전권리를 보장하고 민족의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을 존중한다.”는 우리 당의 민족정책을 널리 선전하고 참답게 시행하는데 모를 박았다. 할빈, 목단강과 통화 지구의 조선족인민들속에 심입한 조선족로간부 주덕해, 방호산 등은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당의 기층조직과 각급 민주동맹 혹은 민주련맹, 조선독립동맹 등을 조직하여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을 중국공산당의 두리에 단결시켰다. 이에 대비하여 당시 국민당특파원들은 국민당을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농민대중들을 강요, 선동하는가 하면 이른바 ‘정통’관념에 빠진 기타 민족들의 심리를 리용하여 민족관계를 도발하고 사건을 조작하며 민심을 교란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혼란한 사회상황에서도 우리 조선족인민은 당과 지방정부의 령도하에 국민당반동파와 협애한 민족주의자들과 날카롭게 맞서 투쟁하면서 여러가지 형식을 통하여 평화를 거부하고 전면적 내전을 시도하는 국민당의 음모를 남김없이 폭로, 비판하였다. 특히 일제투항 후 소작료인하 및 토지개혁과 관련한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제때에 기층에 시달되지 못한 관계로 많은 농민대중들이 국민당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공산당을 선택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을 때 조선족인민들은 추호의 주저함이 없이 자기의 운명을 국민당반동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서 참다운 해방의 길로 나가는 자기의 출로를 선택하였다.
이때로부터 동북지역의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결히 옹호하고 공산당을 따라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를 뒤엎는 투쟁에 앞장서 싸우며 자신의 피와 목숨으로 동북근거지를 창설, 보위하기 위하여 최대의 민족적 희생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자기의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
당시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에게 나서 급선무는 토비숙청전이였다. 토비숙청전은 중국공산당이 동북에서 국민당과 맞서 싸운 주요한 전장의 하나로서 중국공산당이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함에 있어서의 중요한 조치의 하나였다. 이리하여 동북 각지의 당조직에서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근거지를 창설하고 토비숙청을 다그치라”는 지시에 따라 대중을 발동하고 군사타격과 정치적공세를 결합하는 토비숙청방침에 따라 토비숙청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연변지역에는 일제가 패망한 후에 여러갈래의 토비무리들이 있었는데 무려 만여명에 달하였다. 중공연변지위와 연변군분구에서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토벌, 추격, 협격 등 전술을 취하여 토비무리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발동하였다. 화룡의 연길군분구 경비 제6퇀은 화룡경내의 송하평, 오도양차 토비숙청을 끝내고 안도, 통화로 진격하여 계속 토비숙청전투에 참가하였다. 연길군분구 경비 제1퇀, 제2퇀은 연길현 삼도만, 왕청 천교령, 묘령, 라자구 등지의 토비숙청전에 참가하였다. 왕청의 연길군분구 경비 제3퇀은 연길에서 온 부대와 련합하여 라자구에서 토비숙청을 진행하고 훈춘의 보안퇀은 왕청 라자구와 동녕현 로흑산 일대에서 토비무리들을 일망타진하였다. 돈화현보안사령부는 1945년 12월에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주력부대의 협력하에 류화일를 망라한 돈화지구의 토비무리들을 철저히 소멸하였다. 1946년 7월에 이르러 동북지역 조선족집거구의 토비는 기본상 소멸되여 토비숙청투쟁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46년 7월부터 1948년 4월까지 동북지역 각 조선족집거구역에서는 각 지방 당조직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중공중앙의 《토지법대강》과 《토지법대강》을 실시할데 관한 〈보충방법〉을 관철하고 기타 민족 농민들과 함께 주인공의 자태로 토지를 평균분여하는 운동을 힘있게 투진하면서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를 내용으로 한 토지제도가 철저히 시달되도록 담보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토지개혁운동을 거쳐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여오던 수많은 조선족농민들은 봉건적인 착취와 억압에서 영원히 벗어나 정치면에서 나라의 주인이 되였고 경제면에서는 토지의 주인이 되였다. 이리하여 조선족인민들은 드높은 열정과 주인공의 자태를 가지고 생산에 힘 쓰고 참군참전, 전선원호에 앞장 섰으며 새 생활을 창조하기 위한데 진력하였다.
해방전쟁시기 동북3성에서 조선족청장년 6만 2,942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해방구 조선족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였다. 원 송강성에서는 1만 2,600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고 원 료동성에서는 8,753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다. 연변 5개 현에서는 3만 4,855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는데 연변지역 참군 총인수의 85%를 차지하였다. 당시 무릇 조선족들이 살고있는 곳에는 자발적인 무장단체가 건립되여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조선족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였다. 상술한 각지의 조선족무장대오들은 통일적으로 동북인민자치군에 편입되였다가 후에 동북민주련군으로 재편성되였다. 1945년 12월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동북인민자치군에 편입된 조선족장병은 무려 2만여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연변에 11,000명, 돈화에 500명, 길림시에 500명, 심양에 2,000명, 안산에 500명, 철령에 500명, 빈현에 1,000명, 목단강에 2,000명, 가목사에 1,000명이 있었다. 이들은 전략적방어단계(1945. 11-1947. 4)의 “4보림강”, “3하강남” 전역에서 용맹을 떨쳤고 전략적진공단계(1947. 5-1948. 11)의 장춘포위전, 사평해방전투, 황화산-철령저격전, 금주해방전투, 흑산-대호산저격전, 심양해방전투 등 주요 전투와 전역에서 민족의 기개와 영예를 떨쳤는가 하면 전국해방단계의 평진전역, 장강도하작전, 의창—사시전역, 대용—상식전투,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상륙전, 상서토비숙청전 등에서도 영용완강하게 싸우면서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해 불후의 군공을 세웠다. 이 시기 조선족인민들은 전선원조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연변에서 나간 담가대와 운수대원들중 3,427명의 립공자와 1,582명의 모범근무자가 용솟음쳐나왔다. 통계에 의하면 해방전쟁시기 희생된 조선족혁명렬사는 무려 3,550명에 달한다. 그들이 흘린 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붉은기를 더욱 붉게 물들였고 그들이 쌓은 위대한 력사적공훈은 조선족의 혁명투쟁사는 물론이고 나아가 중화민족의 혁명투쟁사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하였다. 전방의 자제병들이 영용히 싸워 군공을 세웠는가 하면 후방의 조선족인민들도 전선을 지원하는 일에 떨쳐나섰다. 조선족집거구에서는 ‘부모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안해가 남편을 전선에 보내며 형제들이 앞을 다투어 참군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였다. 심지어 부자간과, 부부간이 함께 참군하고 갓 결혼한 새각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내는 감동적인 일도 많았었다. 연길시 제2중학교 2개 초중졸업반의 91명 학생들이 몽땅 참군하였고 송강성 오상현 민락촌의 조선족 403세대 가운데서 260명이 참군하였으며 녕안현 서안촌의 조선족 300세대 가운데서 124명이 참군하였고 해룡현에서는 2,525세대의 조선족가운데서 760명이 참군하였으며 심양교외인 영수태의 20여세대의 조선족가운데서 14명의 청년들이 참군하였다…
이 같이 일제투항 후 국제, 국내의 여러 가지 일들이 가로세로 얽히고 어수선하여 국민당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공산당을 선택하느냐 하는 갈피를 잡기 어려운 갈림길에 봉착하였지만 추호의 주저함이 없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해방전쟁에 투입되여 새 중국의 창건에 기여한 중국조선족의 력사적 선택과 그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