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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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    (단편소설) 선녀바위의 전설 댓글:  조회:2637  추천:0  2018-08-17
                                                        선년바위의 전설                                                                최 균 선                                                                                    1       속절없는 세월은 어느덧 18년을 넘겼다.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의 은혜받은 꽃이라는 의미에서 혜화라고 이름지은 딸애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서화라는 사람이 다녔다는 지구의 미술학원에 입학하였다. 혜화는 어머니가 왜 한사코 미술학원에 지망하라는지 그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자기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한 어머니의 소원대 장차 화가가 되리라 작심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인물화에 조예가 깊다는 서화라는 교수가 한 농촌처녀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본따서 그리게 하였다. 혜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초상화의 얼굴이 자기 어머니와 신통히 닮아있는데가 어머니가 밤낮으로 쳐다보며 눈물짓던 그 초상화와 너무 비슷하였던것이다. 크면서 매일 보아왔던것인데다가 어머니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여느때보다 그림이 잘 되였다. 서화교수도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친구들도 어쩌면 그렇게 쉽게 잘 그려낼수 있느냐고 부러워하자 혜화는 얼결에 자기 어머니의 침대가에도 이와 똑같은 초상화가 있어 너무 익숙하였기때문이라고 자랑삼아 해석했다. 친구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방학에 집에 가면 꼭 가지고 와서 확인시켜 달라고 다짐땃다. 방학이 되여 초상화를 학교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보이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펄쩍 뛰였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 몰래 그림을 꿍져넣고 학교로 달려왔다. 동학들은 그림을 보며 감탄성을 지르다가 서화교수에게 가져다보였다.     서화도 혜화가 처음 놀란것처럼 웬간히 놀라지 않았다. 서화는 혜화를 가만히 불러내여 그림의 출처를 캐여물었다. 사연을 알게 된 서화는 돌아서서 눈물을 삼켰다. 학생들에게 그리게 한 초상화는 비록 당년에 그린것이 아니였지만 너무도 잊을수 없는 인물이였기에 그때의 직감을 애써 살리며 다시 그린것인데 성미술전람에서 특등상 을 받았다. 너무도 가슴아파서 학생들앞에 내놓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자 기 학생에게서 꿈에도 잊어본적이 없는 자기의 그림을 보게되다니…                                                                                                             2   …무슨 혁명이 일어난다고 두메마을마저 술렁술렁하던 어느 봄날, ㅂ대학미술 학원을 다닐 때,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고 언제부터 지청구질하던 미화를 데리고  하 늘아래 첫동네라는 백두산기슭의 선녀동에 사생하러 내려갔다. 풍경화도 그릴겸 예로부터 미인이 많이 낳았다는 선녀동에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산꽃처럼 싱싱하고 고전적인 미를 가진 시골처녀를 찾을수 있다면 인물화를 그릴 타산이였다.    하루 한번 통하는 뻐스를 용케 잡아타고 선녀동에 내리여 취한듯 산천경개를 살펴보니 과연 명불허전이 아니였다. 련산련봉이 평풍처럼 둘러있고 앞에는 골골에 벽 계수가 합수하여 마을앞에 맑은내를 이루었고 뒤산 층층바위에 살구꽃이 흐드러져있고 집집에 오얏나무에 하얀꽃이 봄뜻을 자랑하고있다.     “천산과 만산에 홍장 찬란하고 앞시내와 뒤시내에 흰깁을 펴인듯,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는 천고의 절개요, 복숭아꽃 살구꽃은 순식간 봄이라. 기괴한 바윗돌은 좌우에 층층한데 절벽사이 폭포수는 이 골물 저 골물 합수하여 와당탕퉁텅 흘러가는 저 경개 무진 좋을시고…”라고 묘사한 “토끼전”에 한 절구가 절로 떠올랐다.     현대문명의 해살이 이 골령에도 비추고있으나 아직 인간의 손길에 파괴되지 않은채 고색창연하여 별유선경이 이렇든가, 특히나 소문을 많이 들어왔던 선녀봉꼭대기에 선녀암이 지켜보는 마을도 초가집일색이지만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이렇게 산수좋은 곳에는 시골가녀들도 많으리라는 제좋은 생각에 서화가 빙그레 웃자 미화가 무슨 제좋은 궁리를 했기에 바보처럼 웃음을 흘리고 섰느냐고 퉁을 놓는바람에 자아도취에서 깨여나 마을로 들어가는 수레길로 발길을 옮기였다.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있는 허술한 농가가 첫눈에 들어서 잡담제하고 찾아들어갔다. 여름해살이 살처럼 내리꽂힌다면 봄날의 해살은 나비의 날개처럼 내려앉는다던가. 5월도 저무는 때라 한낮의 해살이 자그만한 뜨락에 가득차서 열기를 뿜고있다. 뜨락에 가득한 온기가 노란병아리의 털처럼 보드랍고 아늑하다. 주인을 찾으니 뒤울안에서 병색이 짙어있으나 한창때는 산골에 미인이였을 녀인이 주춤거리며 나왔다.     그녀는 경계하는듯한 눈길로 느닷없이 찾아든 웬 신사숙녀를 가늠하며 어정쩡해 하였다. 미화가 자기들은 미술학원에 대학생들이라는것, 여기에 그림을 그리려왔다 고 전후 사연을 곧이곧대로 말하고 소개신을 내놓으며 돈도 섭섭하지 않게 드릴터이니 한 이틀만 숙식을 제공해 달라고 사정하였다.     “글쎄유, 루추한 우리 집으로 말하문 귀한 손님들인데 여느집과 달라서 제마음대로 손님이랑 척척 받아들일만한 처지가 못돼유, 그러다가 무슨 말썽이라도 생길가봐 그래유, 마을에 들어가서 빈하중농들의 집을 찾아보세유, 이 마을에 사람들은 집집이 모두 인심이 후해서 받아줄겐데유, 그리고 우리 딸애가 어찌생각할지…”    서화는 말끝을 흐리는 주인의 표정을 보며 무엇인가 짚이는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눌러앉고싶어져서“그럼 받아주시는것으로 알겠으니 첫눈에 든 이 집에서 신세를 좀 집시다”하고는 가방이랑 퇴마루에 벗어놓으며 설레발쳐댔다. 점심때가 되였는지 한 숙성한 처녀가 마당에 들어섰다. 묻지 않아도 이 집에 딸이 분명했다.    미화가 눈이 휘둥그래 서있는 처녀의 두손을 와락 잡고 아까하던 말을 곱씹어 하며 역시 좋은 인연이라며 수선을 떨었다. 수집을 타는지 녀자는 서화쪽은 눈길 한번 돌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 력연했다. 시골처녀가 낯선 청년앞에서 머금을 법한 원시적수태가 예민한 통찰력은 가진 서화의 눈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봄볕에 그을리기는 했어도 수련꽃같이 흰 살결밑으로 푸른 피줄이 어슴프레 보일만큼 살결이 맑은 처녀였다. 두볼은 한창 붉게 익어가는 복숭아처럼 홍조가 물들어 있었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건만 진붉은 입술은 석류화를 련상시켰다. 그것은 전류였다. 아직 이성에 대하여 그렇게 골몰해 보지 않았던 자신의 몸과 의식에 팽팽한 긴장과 충전을 일으키게 하는 매혹 그 자체였다.     저녁을 먹으며 미화가 비난수해서야 겨우 모델로 되겠다는 답복을 받아냈다. 해가 뜨면 일밭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을 붙잡고 있을수는 없어서25촉이 될가말가한 전등불아래에서 먼저 초상화부터 그리고 밝는날 점심짬을 타서 자연을 배경으로 수채화를 그리기로 약조했다. 서화는 미술가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의 정열로 이름이 선 아인것처럼 이 시골의 가인을 가진 재간을 통털어내여 그려갔다.     …맵시있게 빚어서 붙여놓은 당실한 코, 산양의 눈을 방불케하는 커다란 눈, 가늘지만 선명한 반달눈섭, 우정 길게 잡아당겨놓은듯한 속눈섭이 검은 눈동자를 순간 순간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는것이 너무 매력적이였다. 그것은 흡사 어느 화첩에서나 볼수 있는 정교롭게 새겨진 불면 종이장에서 날듯이 깐지게 생긴 그녀를 보고 젊은 사나이가 느끼는 그러한 자연발생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활짝 피여난 한떨기 아름다운 꽃처럼 맑은 얼굴에 잔잔한 홍조가 비낄때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갈아앉혀 주었고 그 얼굴에 비낀 고운 심성이 더구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화는 감각으로가 아니라 심장으로 그린 초상화를 선아에게 선물로 주고떠났다. 대학생남자가 그려준 초상화를 받은 선아는 그 청년이 헤여지며 가슴속에 새겨준 그 눈길을 잊지 못하고 공연히 가슴을 설레였다. 시골내기로, 더구나 여의치못한 집에서 태여난 그로서는 언감생심이였지만 속일길없는 녀자의 본능으로 서화가 기다려졌다. 서화는 같이 온 처녀가 없는 틈에 다시 오겠다고 가만히 약속했던것이다.     며칠후 서화는 약속대로 찾아왔고 선아의 어머니앞에서 사위로 삼아달라고 엎드려 빌었다. 그렇게 가연을 맺은 둘이는 대번에 련정의 늪에 빠져버렸다. 그와 그녀는 애욕의 피리를 마음껏 불어댈수 있는 그런 상태에 있었다. 충분히 성숙한 그들의 정 열은 흔히 정열을 식혀주기 마련인 정욕의 향락으로 하여 꺼지기커녕 오히려 더욱 세 차게 불타올랐다. 아마도 사랑이란 향락에 대한 감사의 정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모양 이다. 선아로서는 장차 어찌될지 생각하고싶지도 않아서 그저 감각에 자기를 맡겼다.     원래 함께 왔던 미화도 서화를 사랑했다. 그런데 서화가 늘 혼자 선녀동에 간다 는 사실을 안 그녀는 서화에게 천둥같이 화를 내며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표시해 왔던 자기의 감점을 털어놓고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찌 알았으랴, 서화가 선녀동에 한번 가면 며칠씩 묵새기며 선아의 배속에 불행한 사랑의 씨를 심어놓았다는것을, 그 런줄 모르고 한사코 서화를 남편으로 삼는다고 윽윽 별렀던것이다…                                                                             3                       그무렵, 선아는 곧 다시 오마하고 약속하던 서화가 오지 않자 속이 바질바질 탔다. 배가 자꾸 불러갔기때문이다. 그녀는 서화에 직접편지는 못하고 봉투안에 봉투를 넣어 미선이앞으로 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지만 종시 회답이 없었다. 순진해빠진 그 녀가 자기편지를 한번도 서화에게 전해지지 않고 불살라진다는것을 어찌 알수 있었으랴, 그저 자기 혼자만이 무리에서 버림받은 외기러기라고 슬퍼했다.     그녀는 지금 천길나락끝에 서있는것같이 꿈속에서마저 전률하였다. 그녀는 이제 밑창없는 동굴속으로 굴러떨어지는 무고한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세상은 그의 곪아터지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말썽부리가 좋아하는 아낙네들이 속심을 눈치챌가봐 겉으로는 평온한제 하지만 속은 그대로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무엇을 끓이는지 이젠 알수도 없었다. 증오인가? 미련인가?    고운 봄 맑은날 층층이 흘러가는 꽃구름이라도 저도 모르게 한쪼각 음영을 던진다는것을, 그리고 폭우도 실어올수 있다는것을 왜 자초에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가… 리별이 리별로만 완성된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비애라는게 없을것이다. 가령 생각도 생명없는 바위처럼 굳어진다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겪을 일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사랑이 소멸하는것까지를 포함하는것. 꽃핀 이후의 꽃다발 혹은 열매 이후의 열매처럼 쇠잔하게 말라가는것까지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만남의 성찬을 위해서는 아무리 큰 허기와 감동이라도 참아야 하는가? 그것은 실로 무섭고 비장한 일이였다. 보다는 원한과 집념을 버리지 못하는 엄청난 일이였다. 리별뒤에 오는 잊을수 없는것이 훨씬 고통스럽다.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그녀로서는 그저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축음기처럼 생생하게 리별이전의 일까지를 재생시키는 모든 과정을 몇십번이고 몇백번이고 곱씹는 일밖에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은 그처럼 엉망인채로 고르롭지 않게 뛰고있었다.     순진해 빠진 농촌처녀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볼수 있는 두가지 사랑의 방법을 가지고있다. 말하자면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과 관능적인 사랑이다. 관능적욕구를 채 워보고싶은 생각에서 남자를 가졌던 녀자는 거개 정신적사랑이란것을 믿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결혼을 통해 남녀간의 순결한 육체적결합에서만 사랑을 추구하는 처녀가 돌연 정신적사랑에 눈이 떠서 육체적관계만이 능사가 아니였다는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 겨우 초중을 나온 시골처녀이지만 잘 알고있었다.     서화는 선아가 눈을 뜨자마자 생각하는 존재였고 잠들기전까지는 한시각도 떠나지 않은 존재였다. 사랑에는 중간계단이 없다. 사랑은 요람으로 되지 되지 않을 경우엔 관으로 되고만다. 그는 지금 사람들 무리속에서 여느 녀인들과 다를게 없이 살고 숨쉬고 일하고 밥을 먹고 웅성에 시달린다. 그는 남자란 무슨 의미인지 알수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오로지 서화라는 멋지게 생긴 화가만 있었다.     선녀바위밑 소나무아래에서 그들은 더없이 친근한 마음으로 가슴속깊이 숨겨졌던 비밀들을 무랍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에 두심장이 하나로 융화되여 한시간후 에는 벌써 서화의 넋이 은혜의 넋으로 되였고 은혜의 넋이 서화의 넋으로 되여버렸다. 그들의 물음과 대답은 그냥 사랑이란 이 보금자리에서 합치되여 있었다. 마치도 오또기가 아무리 번져놓아도 제자리에서 일어나듯이 말이다.     자기를 포근히 껴안으며 타는듯 입술을 자기 입술에 포개던 서화의 눈에서 애원하는 절절한 마음을 본능으로 다 읽어버렸다. 그녀는 이 남자앞에서는 도저히 저항 할수 없음을 가슴으로 느끼였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무조건 순응하는듯한, 그를 향한 뜨거운 사모의 정이 고패지고있음을 느낄 때 이 남자에게 자기를 다 내주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죽어도 후회되지 않을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는 가시나무우에도 누울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는 소나무에서 흘려내리는 송진내와 어데선가 숨어서 뿜어내는 버섯의 향기와 나무가지새로 엿보는과 햇빛과 무한의 우주와 그리고 작열하는 정열의 속삭임이 있을뿐이다.     남자가 한낮의 양광아래 그대로 드러난 젖무덤과 사이에 얼굴을 묻고 오래오래 미동도 하지 않을 때 선아는 이젠 자신의 일체를 내주었으니 이 남자의 안해가 되고 도시생활을 할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미처 할 사이가 없었다. 스스로 몸속 어딘가 열기에 휩싸이는듯 싶어지며 입에서 단내가 확확 뿜겨나갔다…여느 녀자와 다르련만 성숙속에 미숙이 있었다, 초경험과 욕구, 숫처녀의 아리숭함과 20대중반의 성숙한 웅성의 몸부림이 육신을 깡그리 불태우고 있다는 감각뿐이였다.     남자가 몸을 뚫고들어왔다. 처음이면서도 신비하고 절박한 마음들이였기에 서로 상대방을 집요하게 흡인할뿐이였다. 시간도 굳어지고 태양도 빛을 잃었다. 진할줄 모르는듯 격렬한 몸짓이 그녀를 끝없는 꿈길로 이끌어갔다. 마침내 작열도 끝나고 정적 이, 슴슴한 침묵이 깃들었다. 기이한 정적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몸에서 불덩이가 서 서히 빠져나갔는듯 느껴졌다. 선아는 흐느끼듯 남자를 죽어라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순정을 바친 녀자의 얼굴, 그 몸가짐은 여느때보다 수집은 법이다. 그저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으로 여기던 선아에게 있어서 서화를 사 랑하고 몸을 바친 그후부터 인생이 이처럼 아름다울수 있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몸을 바침으로써 자기 인생도 행복해질수 있다는것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 일인가? 이 세상에서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부터 자신이 어느 처녀들보다 행 복하다고 생각할수 있는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녀자는 한번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잘못 사랑했는지도 반성해보지도 않는법인가? 그는 매정하게 소식도 주지않는 서화였지만 그냥 아름다운 추억만 안고 혼자 웃고 울었다. 리별의 괴로움이 눈물로만 씻겨진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리별의 아픔이라는게 없었을것이다. 오랜 리별기간 눈물젖은 그리움을 달래는것이 선아에게는 참을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하루같이 시간을 거꾸로 돌리며 축음기처럼 생생하게 리별이전 의 일까지를 재생시키는 모든 과정이 하루의 내용이였다.     시골에서는 패풍의 흙탕물에 사람이 빠져죽는 경우가 있다. 살벌하던 비상시대, 마을아낙네들의 눈총질에 온몸이 숭숭 구멍이 날지경이였다. 궁리궁리하다가 마을에 는 남자네집에 갔다고 소문을 내고는 몇십리 떨어진 외할머니네 집에가서 해산했다. 딸이였다. 서운하긴 했지만 남자의 성씨를 따서 서혜화라고 이름지었다. 다행히 인정 사정에 밝은 촌에 주임이 얼렁뚱땅해서 혜화의 이름을 호적에 올리였다. 한시름 놓은 선아는 남부끄러운 처녀과부로 되였지만 평생 “남편”을 기다리기로 마음굳혔다.     세월은 락엽처럼 쌓여갔고 묵어가는 세월의 락엽속에 그리움으로 타버린 애간 장이 묻혀있다. 밤이면 밤마다 추억의 잎새가 어둠속에서 애달프게 울고있다. 세월의 맷돌은 괴로움도, 아픔도, 기쁨도, 미움도 다 갈아버리여 나중에 망각이라는 앙금을 갈아낸다더니만 그녀에게는 그런 망각의 매돌이 없었다. 마음이 마르면 눈물도 마르는 법이다. 선아에겐 이젠 눈물이 없다. 그 긴 세월을 살면서도 밤마다 꿈을 꿨다. 그러나 슈제트도 없고 주제도 없는 난삽하고 지루한 꿈이였다.     …혁명의 불길이 고조에 이르러 각파벌의 쟁투가 무단투쟁으로 번지였던 어느 날, 서화가 느닷없이 잡혀갔다. 평시에 그렇게 이를 갈던 미화였고 이른바 반혁명으로 몰린 빌미가 된 일기장을 자신이 제공했지만 가슴이 섬찍하면서도 그보다 더 극렬한 질투심때문에 량심의 가책도 눌러버렸다.     마음씨 착하고 순진한 시골처녀의 인생을 망가뜨린것은 서화탓이라면 서화의 소식을 선아에게 한번도 알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첫번째 선택도, 두번째로 서화의 인생을 철저히 짓밟은것도 혁명각오였다고 자신을 변명했다. 그러나 10 년도형을 받았다던 서화가 시대적광란이 끝나고나서 곧 억울한 안건을 시정할 때 무죄로 풀려 나왔다. 그 소식을 듣고 미화의 량심의 마지막 방선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돌이켜 생각하면 스스로 면괴해져서 죽을 맛이였다.     더구나 혁명적인 사랑을 한다고 죽자살자하던 남자가 혁명기간 도를 넘은 비행을 너무 많이 한탓으로 잡혀들어가고 나서 역시나 처녀과부로 늙어가는 처지가 되였으니 인과보응이란 결코 빗겨가지 않는다는것을 절감하며 후회를 짓씹고있다. 서화가 그려 준 자기의 초상화를 매일 쳐다보며 남자를 기다릴 시골녀자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 게는 그저 초상화가 아니라 사랑의 초상화, 사랑하는 남자 그 자체일것이다.     평생 한남자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다가 마침내 허망한 사랑에 지쳐버렸을 녀자, 이런 불행한 녀자가 그의 정신기둥이였던 남자가 살아서 돌아왔다는것을 알면 어떻게 될것인가? 역시 죄책감앞서 질투심이 꼼지락거리는것을 말릴수 없었다. 아아, 다같은 녀자의 마음이건만 자신은 왜 이리도 못돼먹었을가? 그녀는 가슴을 탕탕 두드려댔다.          시골녀자의 후반생이 궁금해서 정한과 그리움이 얽혀있는 선녀동으로 가보고싶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서화가 풀려나오는 길로 그리로 가지 않았다면 순박해빠진 녀자는 서화가 자기를 그냥 내버린것으로 알고있을것이다. 미화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서화가 원래 자기와 언약이 있은 남자였기에 다 용서하고 혁명적동지로 결합했으니 다시는 서화를 찾지 말고 새로운 선택을 하라고 편지했던것이다.     그리고 서화에게는 그 녀자가 흑룡강성 어느곳에 한족사람한테 시집을 갔노라고 소식을 들여보냈다. 서화가 그 소식을 믿고있었다면 선녀동으로 가지 않았을것이라고 자신을 위안해 보기도했다. 이제와서 자기가 저지른 용서못받을 죄를 달리 어찌할수 없다고 생각하며 선택을 잘못하고 잘못 살아온 자신을 감출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4       서화는 5년남아 인간이하의 고역에 시달리면서 한시도 선아를 잊은적이 없었다. 누가 보낸편지인지 잘 모르지만 선아가 먼곳으로 시집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나서도 그냥 잊을수 없었다. 채석장에 끌려나가 일에 지쳐 돌아오면서도 선아가 낳았을수도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죽지말고 버티리라 강심을 먹은 그였다.     입이 열개라도 말할수 없고 말했다해도 믿어주지 않고 강다짐으로 죄장을 만들어 옥살이를 시키는 자들이 이갈리게 증오스러웠지만 벙어리 랭가슴을 앓듯 할수밖에 없 어 자기 인생에 언녕 체념하고있었다. 실낱같은 전깃줄은 타고 서로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는 동물들의 공동체. 하나가 아닌 여럿이서 군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집단형성, 참새떼가 무리를 이룬 모습이 참으로 부럽게 느껴졌다.     참새떼를 받치고 있는것은 보기만 해도 위태위태한 전선줄이다. 전선줄은 참새들에게 쉼터이다. 사람에게도 자신을 지탱해 주는 쉼터가 있었으면 작히나 좋으랴, 하늘마저 활짝 열리는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삼키기가 몇번째인가, 그녀는 한창 득세하여 우쭐거리던 ××가 자기를 따르는 미화를 떼여내기 위하여 작간을 꾸민것으로 짐작하며 절치부심하면서 나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벼르기만했다. 그러면서도 미화가 그런 악독한 짓거리를 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구멍이 펑 뚫린것같은 허탈감이 자신의 리성을 멍하게 만들었다. 자기의 마음은 유리로 만들어진것인가? 비록 수정처럼 고귀하지 않지먼 그렇듯 투명하고 쉬이 깨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의 심신은 강압과 고역속에 저도모르게 한마리 목조당나귀가 되여버렸다. 비가 내리기를 기다릴 때 준비한 우산은 상식이라면 청천하늘에서 벼락맞은것은 자기였으니 이 무슨 저주맞은 운명이란 말인가!     아무리 자신을 반성해보아도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였는지 종잡을수 없었다. 뒤숭숭하던 소문이 마침내 현실로 되여 리상이고 사랑이고 우정이고 구중천에 날려 보내고 오로지“혁명”이라는 두글자를 가슴에 새겨야 하는 질풍노도의 시대가 도래했다. 숭고한 예술의 전당이 하루밤새에 아수라장이 되여버렸다. 교정내에서도 여러 파벌의 반란파조직이 묶어졌다. 그러나 부농집에 딸이라는것을 알고나서도 선아에 대한 사랑이 자기 리상과 목숨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였다. 황차 이미 도덕과 량심 상에서라도 책임져야 할 일을 저질렀음에랴,     그래서 선아를 생각해서라도 살벌한 소용돌이속에서“소요파”가 되기로 작정했다. 남들이 투쟁대상을 찾기에 혈안이 되여있는 동안 그는 선녀동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찾느라 천방백계를 다하였다. 물론 그판에 화판을 들고 어정거리는것은 정신나간 짓이여서 그림그리기도 집어치우고 무위도식하는 판이였다.     한편 서화에게서 배신당했다고 절치부심한 미화의 사랑은 증오의 불길로 타번졌다. 그녀는 일컬어“정강산반란파”에 참가하여 미술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혁명 의 렬화속에서 청춘을 불태우려 한다고 선언했다. 혁명적련계를 지으려고 “대장정”을 하느라 남자들과 함께 렬차에서 딩굴며 전국각지를 다녔고 천안문광장에서 불멸의 태양을 우러러 눈이 다 붓고 목이 쉬여도 다함없는 충성심을 불사르며 들떠있었다.     이렇게 이판사판 하는때에 서화도 그냥 무풍지대를 찾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강산파”와 수화상극인“장정파반란단”에 일시 투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대자보를 쓰고 선전화를 그리느라 분주히 돌아치다보니 가슴은 불붙듯 하였지만 당중앙을 보위하고 위대한 령수를 보위하는것이 천하대사인지라 사심을 잠시 죽이지 않을수 없었다. 미화네파와 서화네파는 설전으로부터 드디어 무단투쟁의 준엄한 대치상태에 이르게 되였다. 녀자가 한을 먹으면 오뉴월에도 서리차다고 했던가, 서화와 미화는 개인적으로도 불구대천의 원쑤로 되였다.     미화가 그러거나 말거나 껍데기혁명을 하는 서화로서는 이게나 그게나 피장파장으로 생각되여 그저 남의 눈에 나지않도록 행동하기에 신경을 썼다. 그런 살판치는 나날에도 젊은남녀들은 본성으로 이성을 찾고 즐기였다. 미화가 ××와 붙어다닐 때 서화는 선녀바위밑에서 선아가 들려주던 전설을 되새겨보는것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옛날 이 깊은 골짜에 한 총각이 어머니가 살았다. 하루는 총각이 다병한 어머니에게 달여서 대접하려고 약촐를 캐가지고 돌아는데 느닷없이 해가 가리워지면서 비구름같은것이 몰려오는듯싶었다. 그래서 비가오려나보다 하고 큰 바위밑에 들어섰 는데 그것은 비가 아니라 옷자라같은것이 훨훨 내려오는것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지상에는 있음직하지 않은 선녀같은 녀자였다. 녀자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였다.     녀자는 웬총각을 먼저 서있는것을 보고는 수집은듯 얼굴을 가리였다. 이름이 바위라는 총각이 큰 맘먹고 이제 곧 해가 지겠는데 이런 심산속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자는 천궁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들어본즉 원래 옥황상제의 시녀로 있었는데 그만 잘못을 저질러서 인간세상에 내침을 당했다고 했다. 들어보니 사정이 딱했다.     총각은 이 산에는 인가라고는 자기집뿐이라며 꺼리지 않으면 함께 내려가자고 하였더니 말없이 따라나섰다. 총각의 집에서 며칠 묵으며 인간상정을 알게 되여 차라리 잘되였다 생각하는데 바위어머니가 우리 바위의 색씨가 되여줄수 없겠는가고 청들었 다. 그런데 선녀는 아무대답도 아니하고 고개만 파묻었다. 그때 총각은 다 삼아놓은 짚신을 선녀에게 내주며 맞는지 신어보라고 하였다.     선녀는 말없이 받아서 신어보더니 딱맞다고 하며 매우 좋아했다. 바위어머니가 천상배필이여서 하느님이 점지해주신 색씨이니 바위와 정혼하고 셋이 오손도손 사는 게 어떠냐과 다시 간청했다. 선녀는 "저는 1년이 되면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에 허혼할수 없나이다”하고 눈굽을 찍는것이였다. 총각도 슬피 울었다. 그러건말건 바위어머니는 정한수 한사발 떠놓고 달빛아래에서 혼인을 맺아주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절절한 사랑을 받으며 알콩달콩 살게 되였는데 어느새 일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어느날,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다. 선녀는 무서워서 남 자의 품에 안기며 바들바들 떨었다. “웨 천둥소리에 이리 놀라는거요?”하고 바위가 물으니 "저 천둥소리는 옥황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요"라고 말하는 선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총각은 "걱정마오. 하늘이 저리도 머나먼데 여기까지 붙잡 으러 올라구, 나만 믿고 안심하시오”     그동안 인간세상에 정이 들대로 든데다 마음씨고 고운 남편을 떠나기 싫은지라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작심했다. 천둥이 련속 세번이나 울렸다. 그래도 하늘 로 올라가지 않았다. 대노한 옥황이 냉큼 잡아오라고 내려보낸 천신이 선녀를 잡아끌 고 산우로 올라가자 총각도 한사코 따라올라갔다. 선녀와 총각은 살아도 같이살고 죽어도 같이죽자고 서로 부등켜안았다. 천신이 그 정상이 갸륵하여 혼자 천궁에 돌아가 선녀가 이미 속세의 인정에 깊이 물들어 바위라는 총각과 부부인연을 맺었으니 이미 몸을 더럽힌바라고 아뢰였다.     천둥같이 노한 옥황상제가 우뢰신을 시켜 당장 큰 벼락을 내리라고 명했다. 이윽고 “꽈르릉, 번쩍!”하며 련신 번개가 내리쳤다. “옥황님이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번개를 내려보내니 이미 인연을 맺은이상 당신을 버릴수 없어요. 차라리 두몸이 하나가 되여 이대로 바위라도 되여버립시다.”하며 남자의 품에 스며들기라도 하듯이 더 꼭 껴안았다. 벼락은 그쳐지만 선녀와 바위총각은 머리 둘에 몸이 하나인 커다란 바 위로 굳어져버렸다. 산아래서 맺지 말아야 할 짝을 맺어주었다고 땅을 치는 바위어머 니의 대성통곡이 구곡구천에까지 울려퍼지였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이 이 바위를 선녀바위라고 이름지었는데 선녀바위에 치성을 드린 부부는 금슬이 좋아진다고 원근에 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단다. 서화 는 출신을 잘못타고 난 하늘선녀라면 자기는 벼락을 맞으면서도 녀자를 지켜준 바위총각이 되여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지군했다. 그리고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한 순결 한 처녀에게서 사랑을 받는 몸이 되여 그녀에게 남녀의 신비한 애정의 장막을 걷어주는 첫남자가 된다는것은 행복과 더불어 신성한 책임감도 느끼게 하였다.     남녀가 격정에 휘말려 금구를 깨뜨리는것은 너무나 례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사랑의 시련을 받아본 일이 없는 순진한 마음을 빼앗는것은 아무 방비도 없고 수비군도 없는 도시를 점령하는것처럼 싱거운 일이다. 농촌처녀, 특히 마음이 어지면 어질수록 더 쉽게 몸을 내맡기는 법이다. 이런 녀자들은 자기의 몸을 받침으로써 그 남자를 영원히 자기것으로 만들었는가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선아와 함께 뜨겁게 달구던 숲속에서 그 몸짓, 파르르 떨던 입술, 애처로운감도 주었다. 서화는 선아가 열어주는  미궁속으로 잠입하고나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깨 달았다. 처음 체험해보는 전률속에서 녀자의 의미를 체험했다. 그는 순정을 바치는 녀인의 철옹성을 정복했다는 희열과 더불어 일종 자책감감이 갈마들기도 했었다.     이름도 정나미돌고 이름처럼 한없이 탐스러운 시골처녀가 생각밖에 서화의 생활 에, 내심세계에 뛰여들었고 서화는 그저 받아들인 피동적인 위치가 아니라 극력 끌어 당긴 셈이다. 시골의 처녀 선아는 하나의 크고 무거운 행성처럼 서화의 감정의 자기 마당을 소란시키였고 그의 생활궤도를 휘딱 개변시켜버렸던것이다…                                                                                       5    단단히 기억했다는것은 결코 영구함을 의미하지 않으며 잊었다고해서 이미 발생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서화는 그동안 자기를 기만해왔다. 악마가 순결했던 자기를 비틀어 놓았다고 저주하고 참회하면서도 사랑의 사신이 천사에게 웃음을 던지고있는 환상으로 그 모진 세월을 겪어냈다. 만구할수 없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허무, 삶의 커다란 허무로 비애의 구덩이를 팠다. 거기에 들어섰다는것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것과 같다. 허무의 종합체를 이루고 또 이루는 그 모든 부산하고 황당했던 수많은 자질구레한 일들이 얽혀서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산다는것은 세월과 함께 사랑과 희망을 곱게 땋아내려가는것이라면 이게 무슨 날 벼락을 맞은 도깨비란 말인가? 여기서는 희망도 없고 인권도 없다. 오로지 억눌리는 인간존엄과 기시와 학대뿐이다. 고달픈 꿈속에서 기갈이 든 한마리 양이되여 녀자의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 그는 지금 막 발정난 황소가 두발을 번쩍들고 암소 등에 업히듯 녀자를 두팔로 덮쳐본다. 눈부신 양광아래 아무 꺼리낌없이 드러나있던 그 호함지던 젖무덤에 묻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남녀의 만남은 우연적이지만 갈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착오적인 시간에 잘못된 만남이였고 잘못된 대상이라면 말이다. 선아의 선택이 잘못되였는가? 나의 선택이 잘못되였는가? 그러나 서화는 가슴깊은 곳에 새기고 또 새기였다. (그대여 당신이 너울쓰는 날 내가 절에서 중의 가사를 입는 날이 될것이다. 당신이 살다살다가 불행하다면 서슴치말고 나를 찾아오시라. 설사 내가 너무 늙어서 걸을수 없는 지경이라도 당신을 데리고 야반도주하리라. 이것이 내가 기다리는 결과이다.)     머리속으로는 얼마든지 좋은 말을 만들어낼수 있다. 역경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지는 않으나 지혜롭게 한다고,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 고통의 숨결속에서 령혼은 발육된다고, 고통을 주지 않는것은 쾌락도 주지 않는다고, 곤난이란 위대한 마음을 키워주는 유모…등등, 그러나 억울한 수난자에게 그런 말이 먹혀들것인가? 누가 세상엔 절망하는 약자는 있어도 절망할 처경은 없다고 하는가? 절망은 청춘과 희망을 좀먹는다. 절망은 아무리 강한자의 의지라도 꺾어버린다. 절망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심리병인것이다.     그가 절망속에서 오락가락할 때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진실이 그를 잊지 않았던가, 그는 풀려났다. 그것도 무죄로 풀려났다. 나오고나서야 알았지만 학 교때 그를 무척 아끼던 ㄷ교수가 밖에서 정책락실을 위해 뛰여다니면서 각고의 노력을 해준 덕분이였다. 변화란 무서운것이다. 변화란 절대 진리였다. 하건만 그 자신은 무슨 변화를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세월이 흐르기만 기다렸을뿐이였다. 참혹한 옥생활은 그에게 인내를 배워주었고 시련은 그를 철학가로 만들었다…     그는 ㅂ미술학원에 당당한 조교로 남게 되였다. 자기를 지옥에 밀어넣은 장본인이 미화라는것도 알아냈다. 그러나 복수를 할수는 없는 일이다. 죽여치워도 성차지 않을 일이였지만 악몽은 이미 꿀대로 꾸었고 마침내 악몽에서 깨여났는데 그런 악착 한 녀자로 하여 또 다시 불구덩이에 뛰여들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무엇보다 급한것은 선아의 행방이였다. 선녀동에 다녀왔다.     선아는 거기에 없었다. 원래 허술하던 선아네 초가집도 무너져있었다. 그는 실망을 안고 돌아섰지만 사랑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비록 맹세하지 않았지만 선아가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믿고싶었다. 맹세는 말에 지나지 않고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선아는 속깊은 정으로 맹세한 녀자가 아니였던가?     사실이 어떻게 해명되였든 꼬리표에 달린 선입견은 검질기였고 서른살이 넘은 로총각인지라 대상자가 얼른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애써 가정을 이루려고 생각 하지 않았다. 어덩덩 세월의 화살은 어느새 사십세고개에 꽂혔다. 사십세가 지나면 인간은 자신의 습관과 결혼해 버린다고 누가 말했던지 그는 결혼을 포기해버렸다.     그런데 또 한차례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서화에게 일격을 가한것이다. 혜화에게 출생지를 물어보니 선녀동이라 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을 물었더니 선아란다. 아버지 가 누구인가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미화의 말이 딱 맞는것은 아니였지만 어렸을적에 흑룡강에 이사가서 자라다가 중학교를 다닐때 연변에 다시 나왔고 어머니는 선녀 동에서 홀로 살고있다고 했다. 혜화가 자기의 딸이였다. 이 무슨 천방야담인가!     혜화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학교뒤 산에 올랐다. 저물어가는 하늘은 미치광이 화가가 잡다한 색갈을 제멋대로 칠해놓은것만 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 궁리도 떠오르지 않아 멍청이처럼 그냥 앉아있었다. 첩첩한 산릉선이 검은 빛갈로 그어진 하늘위에 초생달이 신비로운 쪽배처럼 걸려있다. 어떤 감탄도, 표현도 부족할 령롱한 달빛, 그 달빛으로 청산은 문자표현을 비웃는것만 같았다.     구멍이 펑 뚫린것같은 허탈감에 리성마저 멍해졌는데 기상천외로 찾아든 행운은  꽃구름을 타고 공주를 찾아가는 왕자처럼 들뜨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아가 겪었을 인생고를 상상하니 가슴속에 안개비같은것이 서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던 일희일비가 구름처럼 낮게 드리우며 눈에서 시큼하고 뜨거운것이 솟구쳐올랐다. 마침내 그는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선녀동으로 달리는 장도뻐스, 차장으로 들리나니 꽃피는 소리 가득하다.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봄꽃들이 넘쳐난다. 사람 환장하게 하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제비꽃, 메꽃…이 꽃들의 소요! 사람 홀린다는 꽃바람 불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저 꽃들의 매력!서화는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선아만은 늙지 않고 전설 속에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대로 있었으면 하고 빌고빌며 가슴을 어루쓸었다…                                                                                           2014년  에
891    (진언수상록 100) 현대의 풍경 댓글:  조회:2437  추천:0  2018-08-10
                                             현대의 풍경                                                      진 언       사람은 물질을 창조하지 못하지만 물질가치는 창조할수 있다. 이런 가치창조는 지극히 인간적인것이다. 그런데 돈이 말하는 시대, 가공할만한 가지가지 풍경들이 사 람들을 곤혹에 빠지게 한다. 물은 고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고기도 물을 위해 사는것은 아니듯 돈은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건데 종당에 사람이 돈의 노예로 되고 말았으니 자업자득치고 너무 비참한 결과라 할것이다.     인도의 야무나공원에 마하트마 간디의 추모공원에 간디가 말한 일곱가지 악덕 (철학이 없는 정치, 도덕이 없는 경제, 로동이 없는 재부, 인격이 없는 교육, 인간성 이 없는 과학, 륜리가 없는 쾌락, 헌신성이 없는 종교.)이 적혀있는데 무릇 고관이든, 억만갑부이든, 밀차를 밀며 폐품을 줏는 사람이든, 농사짓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심사숙고를 자아내는 경세지언이라 할것이다.        그러나 돈이 “만능”인 시대에 다른 말은 다 허드레 잡소리로 되여있다. 돈만 많으면 잘사는 집, 돈이 없으면 못사는 집으로 판정된다. “잘 산다”는 말을 엄격한 의미에서 따지면 부유한집,부자집, 돈많은 사람 등으로 표현해야 맞지만 누가 그런걸 일일이 캘것인가? 오로지 돈만 많으면 되는 판인데,     일찍 주작인은 한남자의 합격, 불합격을 판정하려면 녀자와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기준은 당시 중국남자들의 실정에서 판정한것이지만 현대시점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진정한 인격력량은 돈과 권력, 감각적행동에서 가늠되여야 한다고 말할수 있겠다.     남자의 능력과 인격력량은 지갑에서 나오고 과시욕도 돈다발에서 체현되는바 명함장은 자가용의 열쇠로 설명이 된다나, 젊은남자들의 인생자세가 그러니 젊은녀자 들도 현숙함대신 돈에 대한 추구가 공중전을 하며 자신들의 실제보다 턱없이 높고 류행보다도 더 빨리 회전하고 있는 기관을 창출하고있다.     남녀간의 사랑도 원초적인것과는 일만팔천리로 동떨어지게 된 오늘, 고급식당에 가서 와인을 따르고 하루 몇번씩 옷을 갈아입고 외제차를 굴리여 호화별장에 가서 침대유희로 절정을 이루고 그것을 선망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게 된 현대인부자들이다.  돈지갑이 엷은 남자는 3등공민, 무능력자로 점찍히는것은 이 시대의 아이디어인가?     돈이 말하는 시대, 의리도, 도덕도, 량심도, 우정도, 사랑도, 혈육의 정도 일종 부호로 되였다. 눈에 보이는것은 돈으로 포장된 자기 리익뿐이다. 공공의 리익은 공익이라 하고 국가리익을 국익이라 말하면 어페가 없는데 개인의 리익은 “개익”이라 하면 되우 웃기는 표현일게다. 그런들 어떠랴, 리익만 챙길수 있다면 만사대길이다.     맞다. 그래서 중국에는 가난은 비웃을수 있어도 매음하는것을 비웃을수 없다는 관념까지 굳어진것이다. 인간의 관념이 이렇다보니 돈과 권력이 야합하기에 이르렀다. 오사모는 누구의 머리에나 쉽게 씌워지는것이 아니다. 두 눈을 한껏 부릅뜬 권력의 눈은 밑창을 알수 없는 블랙홀같이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그도 그럴것이, 권력한자락 쥐고있으면 호풍환우할수 있고 주지육림에서 자맥질할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인문환경에서 돈을 물처럼 퍼쓰며 산해진미를 먹겠지만 결국 분변으로 배출되고 하루 몇번씩 옷을 갈아입어봐야 외형의 변화일뿐이지 환골탈태는 못된다고, 쉽고 빠르게 얻은 성취는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자신의 행동이 만들어 낸 가치로 자신을 판정해야 마음이 튼실하다고 설교한다면 전혀 웃기지도 않는 머저리같은 롱담이 되여진 이 시대이다.     남보다 옷이 값싼것이라 느껴지면 창피하고 남들이 자가용을 굴릴 때 나만 없으면 창피하고 남들이 돈쓰는만큼 못쓸 때 창피하다 생각하는 리유는 사람들 서로에게 가하는 가진자와 없는자의 심리적차별이 있기때문이다. 서로 극심하게 경쟁하면서 뭐 하나라도 뒤지면 차별시하기때문에 마음들에 안정이 깃들수 없게 된것이다.     천박한자는 돈지갑이 불룩하면 오히려 경박해진다. 마치 가득 불궈놓은 고무풍선처럼 둥둥 정처없이 날아간다. 풍선이 잘 뜨는것은 속에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외국에 가서 명품, 사치품을 싹쓸이 하며 호기를 피워봤대야 자기 감각의 우물안에 팽창일뿐이다. 우물은 넘쳐나는 법이 없고 강물을 범하는 법이 없을터,     모든 판단착오, 시행착오는 궁극적으로 착각에서 일어난다. 인생의 초행길에서 대번에 꿀떡을 얻은것은 행운이라할세 처음부터 달디단것만 맛보며 살다가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인생고를 맛볼때 그 쓴맛을 감당해낼수 있을것인가?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성공은 마침표를 한송이 꽃으로 변화시키고 실패는 쓰디쓴 약 으로 변화시킨다. 고진감래라 할가, 흥진비래라 할가?     허세는 더 요란한 허세를 낳을뿐이다. 허세에서 진정이 나오기를 바라는것은 너구리가 사향노루가 되기를 바라는것과 같다. 허세가 인격력량이 아니지만 많은 사 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고있다. 당신은 못보는가? 공방형의 금사슬에 목을 매달았던 탐욕자들이 일조일석에 원점으로 돌아온것이 아니라 일패도지하는것을, 만악의 근원이라는 돈이 내린 결론이 자기를 너무 따르면 그렇고 그렇다는것인가?     그러나 세상에 절대경은 없다. 인촌에서 화복이 뒤바뀌기는 한순간이다. 예수가 칼을 쓰는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듯이 돈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끝끝내 그 돈으로 하여 잘나가던 신세를 망치고만다. 작금에 추풍락엽처럼 락마한 크고작은 락마관들이 돈베개를 베고 돈타령을 흥얼거리다가 미끼통에 지렁이 신세가 되지 않는가?     물론 돈만 바라본다는 관념의 본의는 절대적으로 나쁜것이 아니다. 국가경제가 증장하여 백성들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것은 인지상정이니 사람마다 돈을 바라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일체는 돈을 향하여”가 되다보니 보이는것, 들리는것이 돈, 돈이 될수밖에 없고 돈이 제일 발언권이 있는 시대가 된것은 당연지사인것이다.    그러나 제중태를 채우기 위하여, 소수인의 리익을 위해서 눈이 뒤집혀 국계민생도 거꾸로 보인다면 결국 비극은 엮어질것이다. 아니, 비극은 이제 고조에 달했다. 환언한다면 돈을 바라본다는 관념이 리기의 대명사가 되였기에 결국 사단이 일어날수 밖에 없다. 문명개화한 인간이 마침내 돈-공방형의 노예가 된것이다. 이는 희사인가? 비극인가? 돈많은 자들에겐 너털웃음이 나오는 희극일것이요 돈을 갖지 못한  한한 사람들에겐 통곡해도 시원치 않은 사회비극이 되였다.     가난하여 무시당하는 리유는 “못배우고 못났기…”때문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강자, 부자들이 돈나오는 구멍은 다 차지하다보니 아무리 등골이 휘게 일해도 가난은 가난대로 세습되는 현실, 열심히 농사지어도 가난모자를 벗어던지지 못했던 농민들에게 가난이 운명으로 고착되였다. 아무리 아글타글 일해도 부자가 되기는커녕 가난을 면치못하는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높아지고 “못나고” 못배웠기때문에 기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야 한다며 체념하고 사는 운명론자들의 절망으로 넘치는 현실…     “누구나 열심히 분투하면 부자도 될수 있고 출세할수 있다”는 말은 실증된 진리가 못된다. 가진자와 없는자의 량극분화가 극에 이른 세상에 기회균등이니 평등한 사회건설이니 하는 말이 가당하기나 한가? “족쇄”가 풀린 금전만능주의는 “탐욕” 이 좋다는 슬로건아래 사회불평등과 빈부격차를 가속화하는 악과를 무르익히고있다. 이것이 괄목할만한 현대의 진풍경이다.                                                                    2015년 7월 18일
890    ((진언수상록 98) 약자영탄곡 댓글:  조회:2158  추천:0  2018-08-10
                                                                  약자 영탄곡                                                                       진 언       강약은 절대개념이 아니다. 종래로 약자에 대한 정의가 없는바 “약” 은 근근히 일종 비교급일뿐, 나보다 사회지위가 낮고 나보다 못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약자” 이다. 쉽게 말하면 나의 눈에 강대하게 보이는 요소의 반면이 곧 “약”이다. 조물주가 억조창생을 내실 때 강약의 본성까지 금그어 주었다고 할지라도 “약자”에게 잘못이 없고 사회가 불공평한 탓이라는 말은 약자들을 각성시키는 의의를 띠고있다.     지금은 온갖 매체에서 보이고 들리느니 잔인한 가해와 피터지는 피학대에 대한 뉴스인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자와 약자로 나뉘여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비극이 비일비재인게다. 가정폭력, 교내폭력, 군내폭력, 국제적 비피린 폭력과 죽음…더구나 약육강식의 인생현장에서 약자였던 자가 제보다 더 약한 사람을 찾아 공격하는것으로 “봉창”을 하는 악순환이 빚어진 참담한 인간세상이다.        일컬어 잘난자, 똑똑한자, 부자, 지자, 권세자를 강자라 하고 못난이, 빈자, 우자, 무식자, 권세없는자, 그리고 게으른자, 의지가 박약한자를 약자라 할것이로되 그게 운명적이라면 누가 시비할수 있으랴? 약자는 선량하다는 전통관념이 약자들의 자아위 안이 되였던가? 약자가 선량하지 않으면 어쩔테란 말인가?     자고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했다. 힘센놈이 왕질하던 아이적에는 단주먹에 상대를 코피나게 한 놈이 완력이 센 놈이었다. 주먹심아래에서는 아무리 머리좋고 공부를 잘해도 가나오나 뛸데없이 침먹은 지네가 되였다. 사실 어른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일단 믿는것이 주먹이다.주먹이 약하면 제집에 들어온 강도에게 두눈을 펀히 뜨고도 란타질을 당하며 굴욕을 삼켜야 한다.     가령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시되는 인간사회라면 강자와 약자로 극명하게 갈리지 않을것이고 강자는 강자대로 으시대고 약자는 약자대로 기시, 릉멸, 불안이라는 구름아래서 살지 않아도 되였으련만 정글법칙아래 운행되는 인간사회도 약육강식이 상식이 되고 강자독식이 합리화되였다. 약자의 눈물을 씻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고 약자의 심병을 치유할 약이 이 세상에 없다.     약육강식은 야만시대의 잔습으로서 동물에게 한한것이라고 할수 있으나 우승렬패는 분명히 합리화되고있는 현실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나 또는 인생의 원리냐? 아니냐? 하는것은 별개로 하되 이는 력사가 증명하는바이다. 약자가 원한다고 세상이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 력사란 기록된적이 없다. 강자가 힘으로 지배할 때 약자는 강자에게 무조건 굴종해야만 생존이 가능하였다.“인류에게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원칙은 정의이며 약자에 대한 정의는 보호와 친절이다.”라는 명언이 있더라만 자유와 평등은 공백수표처럼 공리공담이다.     진정한 강자는 약자의 아픔을 리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사람이여야 하는데 우수한 자는 렬등한자를 무시하고 박대하며 부자는 빈자를 향하여 “왜 그리 가난하냐 ?”고, 강자는 약자에게“그렇게 약해 빠질것이 무엇이냐 ?”라고, 학자는 무식한 자를 대놓 고 “너무 무식하지 않냐 ?”하고, 건강한 자는 병자를 대하여“어찌 그리 약골로 태여났냐?”라고 빈정거려도 재하자는 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이라, 강자들의 시각에서 약자의 천성이란 무엇일가? 역경속에서 인생고를 읽고 새로운 삶의 계기를 발견하려는 자는 생활의 강자로 보고 불행과 고통속에서 마냥 위축되여 보이는것도 안보려고 눈을 감는 자를 현실도피자라 한다. 약자가 역경에 위축되고 강자앞에서 기가죽고 무력해지는것이 천성이라면 불행한 운명이다. 그래서 약자는 자기보다 강한 자들의 생각을 빌려 생각하고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할수밖에 없다.     선량함은 약자의 덕성이 될수는 있어도 이 험난한 인생길에 통행증일수는 없다. 약자라해서 무조건 동정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슬픈 조우이다. 약자들이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세상이나 상대방을 아주 작은 크기로 축소시켜놓고 그 앞에서 제 크기의“충분함”에 자족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들의 저렬한 근성이다.     많은 “약자”들은 종종 자신을 긍정하는 강자들과 혼동하며 그런 자신을 스스로 강자라고 착각한다면 구제불능이다. 이들이 알고 있다고 믿으며 보는 세계란 자기가 사는 작은 동네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 있는 난쟁이란 알수 없는 어떤것을 아주 익숙한 자기 동네의 별것 아닌 소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운명이 걸린 대결조차 전쟁놀이로 만드는 골목대장같은 자들이다. 이들과 만날 때 세상은 불행해진다. 저도 모르게 그들의 크기만큼이나 작아지기때문이다. 난쟁이의 어이없는 자신감과 갖잖은 교만은 꼴불견이다. 실속없이 환상적인 “강자” 는 상대방의 강점과 대결하려하면 유부가 되기십상이다. 약자들은 거개 자기의 유약함을 증오심으로 전환시켜 다른 약자에게 성풀이 한다. 이것은 약자들의 렬질품성이다.     약자들은 위축된 마음으로 세상이나 상대자의 크기를 과대평가하여 그와 마주선 자신의 크기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내면적소인이라면 난쟁이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세상이나 상대방의 크기를 축소시켜 그와 비교되는 자신의 크기의 충분함을 긍정하는 내면적“거인”이다. 전자가 세상을 착각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지 못한다면 후자 는 자신의 무능력을 잊기 위해 세상을 전도시킨다.     약자에게는 강자들 속에서 살아남는 수단인 유연성이 다행일지 모른다. 강자가 약자들앞에서 개잡은 포수처럼 으시대는 심리가 생기는것은 이때문일것이다. 누구를 압제하지도 누구에게 굴욕당하지도 않을 때 사회에 조화가 영주한다는것을 진실로 아는자는 오직 약자들속에 있지만 그런 속절없는 하소연에 누가 귀를 기울일가?     선천적으로 구제불능의 약자는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아 자위한다. 강자는 어디서나 공격성을 앞세우지만 약자는 어디서나 비난거리를 찾는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자가 진정한 강자이건만 그런 강자는 가물에 콩싹처럼 희소하다. 이는 약자가 강자와 공생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로 되였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통탄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약세군체의 숙명이요 인생에서 가장 큰 비애가 뭐냐고 자문하면 약자의 비애이라고 대답할것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육체적강자가 못되고 후천적으로 지적인 강자로도 못된 자신이기에 처처에서 새여나 오는 약자의 “영탄곡”에 비애를 느끼며 공감하게 되고 동조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묻지 않더라도 내가 절치부심 미워하는 무리들은 약자들을 기탄없이 짓밟으며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해 온 “강자”들이라고 말할것이다.     약자가 자기를 위안할수 있는 유일한 론거는 “세상에 상승장군이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뽈레옹도 워털루에서 패전하지 않았나?”하는것이다. 사실이라도 약자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용서, 관용” 이다. 용서와 관용은 강자들의 특허이다. 약자에게는 용서받을 자격은 있되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 할 권리란 없다. 힘이 약하면 인애로 감화시키라고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자고로 약자의 평화적“공생”의 구호가 그들 자신의 권익을 보장해 준적이 없다. 힘의 론리가 종횡무진하는 세상에서 무조건 강해지고 볼일이다. 강력하다는것과 선량함은 상충되지 않는다. 선량함과 나약함이 결코 등호로 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강의 길밖에 없다. 정글법칙이외엔 모두 공리공담이다.      “약자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이 호소가 약자영탄곡의 미성이다.                                  2015. 10. 1일
889    (진언수상록 97) 언간생심 권위를 긁어보다 댓글:  조회:2293  추천:0  2018-08-08
                                                     언간생심 권위를 긁어보다                                                                진 언       권위자란 어떻게 정의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언구정(一言九鼎)으로 사람들을 탄복시켜 한결같이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라 할것이다. 권위에는 인간의 권위, 직위의 권위, 법과 규정의 권위, 국가와 공동체의 권위 등등이 있다고 한다. 무릇 권위는 인간의 불평등과 부자유의 근원으로서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권위가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복종의 소산이며 권위와 리성이 대립하는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권위에는 실질적권위가 있고 형식적권위, 또한 신뢰적권위와 공포적권위가 있다. 사회질서와 통합에 도움이 되는것은 실질적권위, 신뢰적권위이다. 형식적권위를 례를 들어 설명한다면 마음으로는 상급에 맹종하려 하지 않지만 자기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지엄한 지시에 우선 응하는체 하는것이다. 공포적권위는 공포의 대상이 힘을 잃으면 붕괴하므로 안정된 권위가 아니다. 억압을 통해서는 공포적권위밖에 안되며 선전이나 세뇌교육을 통해서는 형식적권위밖에 형성되지 않는다.     진정 권위자란? 실적과 언행일치에 있지 허명을 쓰고 말만 번지르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실적으로 말하고 실천해야 명실상부 권위자이다. 학자의 권위는 지식의 확실성의 권위이고 기술자의 권위는 기술의 효능의 권위이며 법의 권위는 누구나 꼭 지켜야 한다는 약속의 권위라고 보면 비교적 잘 리해될것이다. 권위의 근거는 사람들의 신뢰, 인정(认定)에 있다. 학교로 말하면 교원은 학생들에게서 인정받아야 하고 위정자로 말하면 백성들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할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저의 도덕성도 지녀야 한다.      학술권위ㅡ하면 우선 과학원원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원사의 칭호는 근근히  해당된 학술성과에 대한 인정일뿐이다. 과학탐색과 창조가 무지경이라할 때 절대적인 학술권위란 없다. 그만큼 최고학술칭호와 최고학술수준 사이에 등호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작고한 중국과학원원사 왕선(王选)선생의 말이 론거로 될수 있다.     “원사를 당전 령역에 학술권위라고 보는것은 착오적이다. 나는 늘 시태(时态)를 혼동하였는데 과거식, 현재식, 장래식을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였다.” 라고 하면서 자 기의 경력으로 설파하였다. “나는 38세에 연구령역의 최전선에 나섰지만 무명소졸이였고 58 세에 량원원사(两院院士)로 되였지만 2년전에 설계방면의 제일선에서 물러났다. 지금 68세로서 또 국가의 최고과학기술상을 받았지만 이미 학술연구의 전초에서 멀리 물러나와 허명으로 살아가고있다…”     과학에는 “최고”가 없고 오직 “더욱 높은것”이 있을뿐이라는 말이 있다. 창신은 권위를 미신하지 않는다. 부단히 권위를 타파하는것은 권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불문률이다. 권위가 좋아하건말건 익숙한것으로부터 진정 아는데로 나가려면 의문을 가지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즉 “권위성” 에 도전해야 한다. 권위에 대한 맹종은 노예적이며 허영이며 리기적이며 체념이며 음울한 광기이며 사상을 버리는 자아상실이다.     인류는 마치 영원히 암흑속을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미지의 세계이다. “모든것을 의심하라!”는 탐구의 횃불을 추겨들고 자신의 길을 밝혀야 거듭날수 있다. 학술권위속에 “물없는 저수지”, 명리에만 목을 맨 학술부패분자들은 허울좋은 허상들이라 할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것을 의심하라!”고 납함하였다. 이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론거는 아마도 세상에 절대적인것은 없다는 명제일것이다. 정확성의 대명사인 수학도, 창조상상의 걸작인 과학도. 조리정연하다는 론리학의 기본원리조차 의심할 여지가 있다. 례하여 고대중국의 조충지는 선인들의 과학연구방면의 결론들에 의심을 가지고 고심참담한 관찰과 연구를 거쳐 수정보충하였고 가치있는 수많은 과학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가 제정한《대명력(大明历)》은 당시 가장 정밀한 력법이였다. 그의 일곱자리소수점까지의 원주률은 당시 세계상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성과였다.       오직 권위에 과감히 질의를 들이댈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문명세계건설이 비약 할수 있다. 이를테면 뉴톤의 의혹과 연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매무지속에서 자족할지도 모른다. 과학발전사가 증명하다싶이 질의는 진 리를 감싸고있는 층층의 안개를 헤치고 본질을 투시하게 하는 선도자이다. 우리는 습 관적으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것, 자고로 진리라고 여겨온것, 언론이나 학술권위자의 주장, 정의들…이런것들을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라고 확신해왔다. 기실 따지고 보면 자기 확신에서의 공조가 아니라 상대의 확고한 의식에 대한 맹신이였을뿐이다.      례하여 한때 달에서 중국만리장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말이 나돌면서 중국사람들을 무한히 고무추동하였다. 이 말은 미국의 “아폴론12호”의 우주비행원이 기자에게 한 말이다. 마치 50메터밖에서 머리카락을 보아낼수 있다는 말과 같다. 더 비유해 말한다면 384킬로메터 밖에서 한대의 얼음과자를 볼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거짓말이 발붙일수 있은것은 달에 착륙한 “권위자”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달과 지구사이의 거리는38만공리이다. 그는 이것을 거짓말의 전제로 삼을수 있었던것이다.     미국의 인문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기의 저서《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권위주의 권력의 힘에 눌려)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수백만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같기때문에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라고 권위 주의의 피해를 지적한다.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지않고 근거가 없는 불합리한 권위 는 비민주적인 사회를 만든다는것이다.     만약 스스로 시비를 바르게 가렸다고 확신한다면 무릇 대방이 누구이든 그의 말에 마음의 꼬리를 흔들어댈 필요가 없다. 반대로 모모가 권위라해서 내 개성을 죽일 수는 없다는 정서로 7×3=21일도 반대하는식의 정서는 좋지않다. 반대하기 위해 반대한다면 우를 범하고 그속에 자기를 파묻고만다. 마치 내가 그것에 대하여 확실히 알고있기때문에 흠집을 찾아내는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무조건 확신하는것도 일이 아니지 않는가?”하는 식의 거부는 무모하다.     살아가면서 자기와 다른 사이에 권위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벽을 쌓을 필요는 없다. 권위를 타파하자고 웨친다면 듣는 사람은 강렬한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생각 할것이다. 권위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한다면 먼저 자기 마음속에 하나 의 관념모식이 잡혀있고 땀으로 이룩한 성과로써 권위를 타파하려고 행동해야 한다 자아가 부재하면 권위로 못된 약자의 경이원지에 불과할것이다.     권력의 권위주의를 아예 접어버리고 인간본연의 모습으로 현연되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평민백성도 드물거니와 권위라는 보검을 손에 쥐고도 함부로 내두리지 않는 고매한 인격을 소유한 권위자는 더구나 희소하다. 권위자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더 빛나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타파되여야 한다.     이른바의 권위주의인격은 환영받지 못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권위주의 인격이란 복잡하고 완고하고 각박하며 상대적으로 사람을 들볶는 인격체계이기때문이다. 이에 는 종족편견, 보수성, 맹종, 개인숭배의 전통관념 등 서로 얽힌 반민주주의 정감과 의지가 포괄된다. 권위주의는 일반적인 사실이나 상대의 의견은 무시한채 기존의 권위 에 내흔드는 사고모식으로서 전혀 도움이 안되는 재세만 부리기에 웃기고있다.                                                      20013년 5월 15일
888    진언수상록 (96) 과잉시대 경탄조 댓글:  조회:2244  추천:0  2018-08-01
                                                 과잉시대 경탄조                                                         진 언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보고 듣고 느낀대로 말하면 한마디로 “과잉시대”라 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우선 물질적인 공급의 과잉, 막아낼길 없는 유혹의 과잉, 욕 망의 과잉, 대홍수로 비유되고 있는 정보의 과잉,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추구로부터 빚어진 영양과잉…아무튼 물질적, 지적, 심리적인 모든것의 앞에 관형사처럼 “과잉” 두 글자를 붙일수 있는 이 시대이다. 례컨대 과잉생산, 과잉정보, 과잉영양 등등…     무어나 넘쳐나는 과잉시대에 살고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천방야담같은 얘기가 되겠 지만 개혁개방 이전까지 몇십년은 참으로 무어나 결핍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모든게 결여하니 누가 권장하지 않아도 가슴에 새겨진것이 절약정신이였다. 깁고 또 기워입으면서도 오로지 넘치는것은 혁명사상과 혁멸열의, 혁명기개였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일상이 정치생활로 이화되였기때문이다.     사람은 오래살고 볼일이라더니 참으로 상전벽해라 할가, 무어나 수요대로 가질수 있다는 공산주의사회에 대한 막연한 꿈이 시들해지던차에 물질풍요시대, 무엇이나 넘쳐나는 과잉시대가 올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상품들이 과잉이다보니 돈만 있으면 무엇을 못살가봐 걱정할 일도 없고 상점이 지천이라 줄을 서서 조바심칠 일도 없다.     많을수록 좋다는 인간욕심의 계률로 말하면 많아도 근심, 걱정이라는 론제가 모순되기도 하겠으나 지나침을 뜻하는 “너무”라는 단어가 있다싶이 무엇이건 너무 많아도 일종 부담이 되지 않는것은 아니다. 무어나 결핍하던 시대에 가장 매력적인 단어가 다다익선이였다면 지금은 너무 많은것도 아름다운 걱정거리가 된것이다.     이를테면 과잉생산으로 인한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현상도 떠올려볼수 있다. 무엇이나 표제를 하던 그런 “계획경제시대”를 좋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생산과 소비, 공급 과 수요가 맞아떨어지지 못하는 극한적 상품경제 그 자체에 제약성도 고유된것이다. 보편적으로 그리고 정체적으로 본다면 없는것보다 있는것이 장땅이고 부족한것보다 충족한게 좋다는것은 상식이로되 과유불급은 또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나로 말하면 지금 세월에 잘산다고 말할 처지가 못되지만 옷장엔 남을 주기도 별로이고 버릴수도 없어 그냥 걸어둔 옷으로 넘쳐나고 신발장에는 어둠속에 갇혀 지내는 묵은 신들이 삭고있다. 서재에는 읽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들이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있다. “부족함의 시대”를 용케도 넘어 “과잉시대”에 살게 되였으니 군소리를  한다면 배부르니 흥타령 한다고 흘겨볼 사람도 있을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로서는 정치경제리론을 들먹이는것이 주제넘지만 싱념은 굴레벗은 말처럼 사유의 광야를 마구 내달리는것을 말릴수 없어 횡설수설하는바이다.     이를테면 지금 부르는게 값이 된 가치실현에서 가치실체가 어떠하며 가격이 가치량에 비례되는가? 치솟는 물가는 수염같고 로임증장은 눈섭같은 현실상황에서 로동량으로 형성되는 가치실체가 가치량을 결정하는 가치법칙이 합리적으로 운행되고 있는 가? 교환관계가 화해로운가? 상품이 가치와 호상 대등한가? 등등,     2001년이후 중국경제가 세번째 계단에 진입하였는데 바로 기본과잉시대라 한다. 우선 옷과 신류에서 과잉생산징조가 나타나더니 강철, 세멘트, 유색금속도 과잉상태 에 빠져 이 류의 기업들에서 우는 소리가 터지게 되였다. 마침내 전국적으로 소비시장이 너무 배불러 소화불량에 걸리고만것이다. 상품경제시대는 호황기를 넘어 양한 마리에 몰이군이 아홉이 된 격이다. 그리하여 광고업이 극성을 부리게 된것이다.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의 전이인가? 제조업이 과잉상태이고 에너지산업도 과잉상태이며 석탄산업도 과잉상태이고 부동산, 전력생산도 과잉상태이다. 연길시의 제1 백화상점을 비롯해서 지하상점, 강북강남의 국제무역청사, 서시장, 수상시장, 농부산품시장, 도매시장외에도 큰거리, 작은 골목들에 촘촘 들어선 각종 상점들…     지금 전지구적으로 과잉산품이 어디 한두가지랴, 례를 든다면 컴퓨터나 핸드폰류, 자동차도 그렇다. 오래전 몇천원씩이나 주고 사놓은 컴퓨터가 후회될만큼 전자제품 값이 폭락했다. 자가용으로 엄청 비싼것도 있지만 웬간한 로임족이라도 작심하면 꽤 쓸만한것으로 갖출수 있는 정도로 차값이 미끄럼질한다. 너도나도 자가용을 굴릴수 있게 되여 삶의 질은 높아졌다고 볼수 있으나 불원간 작은 연길거리에 자동차 “과잉대란”이 생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게다.     상품주택건설도 그렇다. 무작정 리윤추구를 내세우다보니 주택공급과잉이라는 일희일비의 괴리가 생긴게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지난 12월 18일~21일에 열린 중앙경제공 작회의에서 앞으로 부동산 공급과잉문제 등 구조적 생산능력과잉에 적극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중국은 아주 많은 곤난과 도전에 직면해 있고 특히 구조적생산능력 과잉은 비교적 엄중하다”며 과잉생산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일언이페지하고, 그냥 부족감에 시달리던 그 시절에 비하여 좋구좋은 세상이 되였지만 한편 구매함과 동시에 신상품광고가 요란을 떨어서 사자마자 낡은것이 되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자족이 구겨질뿐, 선택할 시간과 낡은것을 버릴 시간이 부족할 뿐, 시간을 챙길수 있는 돈이 필요할뿐인 이 시대. 삶의 목적의 당위성을 다양화시킨 결과를 환호해야 하겠지만 마침내 정보의 과잉으로 정신적 비만의 시대에 진입한것은 또 다른 사색을 불러오고 있음도 사실이렸다.     계획경제시대에 시행착오로 인하여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였다면 상품경제(자본주의경제)의 가장 큰 약점은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것이다. 례하면 약이란 원래 병치료를 목적으로 만드는것인데 리윤만 앞세우다보니 눈에 보이나니 “대약방”이요 약방마다 약을 얼마만큼 사면 무엇을 준다는 “활동”이 통용되고있다. 길상스러운 일인가? 거품경제의 불길한 징표는 아닌가?     역설적으로 과잉은 일종의 결핍이다.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된 공급으로 충족되여 넘어선 그 자리는 과잉으로, 과잉은 이미 그 자리에 다른 결핍을 생산한것이다. 넘어선 그 자리는 다시 채울필요도 채울수도 없으며 넘어선 그곳에 새롭게 채울 결핍만이 있을뿐이다. 우리 사회는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으로 결핍을 극복했으나 이젠 과잉으로 다시 결핍의 국면에 들어서있다.     자발적인 과잉이든 피동적 과잉이든 과잉의 악순환은 이미 끊어버릴수 없는 사회문제로 되였다. 모든것이 넘치는 과잉시대지만 그만큼 불행해지기도 한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는 하나의 방법은 둔감하게 사는것이라고 권고한다면 되우 마뜩치않게 볼것이나 어떤 깨달음을 주는것도 사실이다.     동물들에게는 먹거리의 풍요로움이 시작이자 끝이지만 인간이 추구는 동물들의 그것과 다를수밖에 없다. 행복의 과잉으로 행복을 잃는다면 그게 맞아떨어지는 계산식일수 없다. 과잉시대에서 인간은 존재의 본연을 잊고있다. 모든것을 가지려 한다면 아무것도 가질수 없건만은 그냥 무한정 가지려고만 든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것도 낳을수 없거니와 깊이를 더하지 못하는 분주함 즉 심사숙고와 성찰이 없는 단순함의 반복은 인간자체를 파괴하고 있는것이다.     일개 미미한 민초로서 시대조류로 되여버린 과잉생산→과잉구매→과소비를 두고 시야비야 하는것은 오지랖 넓지만 무어나 결핍하던 시대를 살다가 무어나 과잉된 시대에 살게 되니 그냥 꿈같아서 “과잉시대 경탄조” 가 절로 흘러나오는바이다.                                                                    2015년 5월 25일
887    (진언수상록 94) 인종차별의 비극사 댓글:  조회:2270  추천:0  2018-07-24
                                   인종차별의 비극사                                                             진  언       인간 개체로서의 강자와 약자사이에 빚어지는 비극은 인류의 진화와 동보하였는바 부족간의 침탈과 학살로부터 강약의 대결이 시작되여 현재에 이르러서도 민족, 국가들간에서 진행형이다. 미사일, 폭탄으로 실현되는 강자의 위세는 강도적론리에 실질적 힘을 실어준다. 이 점은 세계헌병으로 자처하는 미국이 잘 보여준다.     약소민족, 약소국가는 도처에서 기시당하고 릉욕당하기 마련이다. 례를 들기에는 비애가 앞서지만 그냥 인용해 본다. 2015년 7월 4일부터 16일까지 타이의 치앙 마이에서 열린 제56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조선이 총점 156점으로 미국(185점), 중국(181점), 한국(161점)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참가선수6명에 3명이 금메달을 받고 3명이 은메달을 받았다. 조선으로서는 력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셈이다.    조선은 1990년에 처음 참가하였는데 1993년부터 2006년까지는 참가하지 않다 가 2007년부터 다시 참가하고있다. 조선은 12번의 대회기간 꾸준히 20위 안에 드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전에 가장 좋은 성적은 2009년의 5위였다. 약자의 비애는 여기서도 재연된다. 지난 2010년 51회 대회에서 실격을 당한적이 있는데 당시 비공식적 기록에는 중국에 이어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2010년 7월 13일 자유아시아방송에 따르면 조선은 첫날 시험중 가장 어려웠던 증명문제에서 문제를 풀기전에 내용을 증명하는것이 모범답안인데 조선 참가학생중 4명의 학생이 모범답안과 같이 풀었다고 했다. 그런데 모범답안처럼 풀기가 쉽지 않아 부정행위를 한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단장회의를 통해서 실격처리를 당했다. 이와 관련해 성급한 결정이였디는 의견이 있었고 나중에는 조선의 부정행위를 인정하는 국가가 절반이 채 안되였지만 흐지부지 그렇게 결정났다.     다른 나라들에서 조선이 너무 잘하는것을 의심한것이다. 2014년 대회에도 이런 의심을 받았다. (국제대회에) 나온지 얼마 안되였는데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그룹에 들어갔으니까, 대회에 참가한 한국의 모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나중에 답안지를 보니까 류사문제를 풀어보며 많이 준비해서 파악하고 있었을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약소국이라고 이런 지력경쟁에서마저 편견을 앞세우는 서양놈들의 독선과 행패에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 분노에 역시 “약자의 비애”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니 자연히 개체도, 민족도, 국가도 잡담제하고 강해져야만 한다는 결론이 굳어진다. 그에 앞서 이런 계제가 어찌 자초되였든간에 단군족이 수모받는것은 격분 그자체이다.     력사적으로 인종차별주의만큼 인류에게 큰 해악을 끼친 이데올로기는 없을것이다. 인종차별은 모든 차별의 원흉으로서 인권문제의 핵심이기도 한것이다. 인종차별은 인종의 우렬을 가정함으로써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고 렬등인종이라고 생각한 인종, 민족을 자기들의 생산도구로 만들려고 했기때문이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다른 인종, 타민족에 대한 혐오하고 기시하며 릉멸한다. 인종차별은 고대에도 있었지만 주로 20세기에 극에 이르렀다.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면 백인들이 저지른 비인간적 만행은 그 어느 인종도 따르지 못할만큼 극악무도하였다.     1440년에서 1879년까지 유럽인들이1100만명 가량의 아프리카흑인들을 붙잡아 남북아메리카에 실어갔다. 그중 100만명 이상이 대서양 횡단중 비명횡사하여 바다에 던져졌다고 력사가 기록하고있다. 백인들은 노예제도를 페지한다고 선포한 이후에도 의연히 흑인들을 차별시 해왔기때문에 장난감처럼 괴롭히다 죽이여 그 시대의 모든 흑인들이 저항조차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인종차별은 계속된다.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최초의 전면전인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중 100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을 감행했음에도 서방렬강들은 아무 량심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악명높은 유태인 대학살을 비롯해서 캄보챠, 동티모르, 구유고슬라비아, 르완다 등지에서의 대량학살등…     그당시 유태인들이 너무 비도덕적인데다 지배계층을 확보해서 유럽인들이 큰 분 노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독일인들은 가난때문에 유태인들에게 더욱 더 큰 분노를 가 지게 되여 유태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획책한것이라 한다. 그러한 수많은 대학살중에 현대까지 나치의 유태인학살이 주로 부각되는 리유는 유태인들이 과거부터 현대까지 세계의 돈을 휘여잡는 지배계층 집단이기때문에 유태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몰이 가 되는건 당연하고 패자로 락인찍힌 나치스 히틀러만이 천하 몹쓸놈이 되였다.     인간은 고기를 안먹고 고기대신 채식으로도 살수 있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건 맛있고 영양가가 높기때문이다. 인간이 재미나 돈때문에 가축을 잡아먹듯이 전쟁, 민간인 학살도 거의 똑같은 리유이다. 달리 생각하여 자기네 리익이나 만족감을 위해서 학살했다면 찢어진 인권주의 기발을 펄럭이는 아이러니를 엮어온것이 아닌가?     나치의 무분별한 인종차별과 악행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해왔던 악행으로 현대에 들어서 나치스의 악행을 주로 부각시키지만 일본같은 다른 강대국들도 나치스와같은 악행을 수없이 자행해왔다. 2차세계대전시기의 수상이었던 처칠이 인도인들을 엄청나 게 학살하고 굶어죽게 만들었는데 유태인들보다 더 많이 죽였을텐데도 이 부분에 대 해 거의 거론이 안되고 있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강자에겐 영원히 착오란 없는게다.     기실 힘있는 국가들은 모두 자신들의 극단적인 리기로부터 출발하여 단순한 리익을 위해 무고한 백성들을 대량 학살했다. 매차 전쟁후에 승자인 영국,미국의 장군들이 만약 자신들이 패자였다면 전범재판에 회부되여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것이라면서 자신들이 민간인 학살을 명령한것에 대해 고백하였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승자들이 보고싶은 시각대로 보았지만 기실 서방국가는 싸탄국이였다.     20세기 중반이나 후반까지만 해도 대도시에 떨어진 지역에서 kkk단에 가입한 수 많은 미국인들이 흑인들을 아무나 골라잡아서는 길가에서 산체로 불태우던 일들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그때까지 미국의 백인들에게 짓밟히다가 케네디대통령 시절에 흑인인권시위가 치렬하게 일어나면서 어느정도 회복되였다. 대저 식민지 백성들에게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고 회개하며 원쑤를 사랑하고 원쑤를 위해 기도하 라는 기독교리보다 더 좋은 설교가 어디에 있으랴만 실제는 당나발이 되고있다.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의식이 얼마나 골수에 박혔는가를 보라!1940~1950년대에 유명한 소프라노 마리안 앤더슨은 흑인이라는 리유로 카네기 홀에 서지 못했다고 하 며 “투영”이라는 노래로 세상에 잘 알려진 넷킹 콜같은 가수는 라스베가스 공연이 끝나면 흑인이라는 리유때문에 자기가 공연한 호텔에 투숙할수 없어서 도시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려인숙같은 곳에서 지내기도 했단다.     2차 대전때 많은 공을 세운 한 흑인해병은 뻐스가 남부의 “매이슨 딕슨라인” 을 지나갈 때면 앞자리를 백인한테 넘겨주고 자신은 흑인이라고 뒷자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부시의 첫임기에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은 그의 자서전“아메리칸드림” 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베트남전 임무를 마치고 다음 부임지로 가기전에 고향인 뉴욕에서 휴가를 보내고 남부에 같는데 백인전용화장실은 륙군장교 정복을 한 파월 대위한테 허용되지 않아서 자유로운 아메리카대지에서 용무를 보았다고 한다. 파월은 씁쓸하게 웃었을가? 통곡했어야 했다. 백색인권주의란 워낙 그런것이지만도,                                    2015년 7월 18일
886    (진언수상록 92) 총명의 도(度) 댓글:  조회:2311  추천:0  2018-07-22
                                                         총명의 도(度)                                                                 진 언                                       똑똑하다, 머리가 좋다를 총명하다고 하는데 총명(聪明)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총은 청각이 령민한것이고 명은 밝고 선명하여 밖으로 잘 드러나는것을 의미한다. 총명은 유전적인것으로서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며 진가,선악, 정의,사악, 시비를 가려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어에 “이총목명 (耳聪目明)”라 한다.     총명의 정의, 기준, 측정에 론란이 많지만 한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아직 백프로 과학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지혜가 생존의 경지 혹은 경계 (境界) 라 한다면 총명은 생존능력이다. 흔히 누구는 총명하고 누구는 우둔하다고 평판하는데 총명에도 소총명과 대총명이 있으니 어느것을 기준으로 하는것일가?     어떤 사람이 소총명한 사람일가? 여러가지 여건이 있겠지만 우선 눈앞에 리익, 다다익선의 감각에 리성을 잃은자는 결과적으로 소총명한 자이다. 소총명한자는 기능과 기량을 갖추었기에 인맥을 찾는데 달인으로서 재부와 권력을 잘 낚는다.       하다면 대관절 가장 실제적인 총명의 기준은 무엇이며 총명의 한도는 무엇으로 가늠되는가? 저사람은 손해보지 않고 우둔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평판할 잣대는 무엇인가? 바로 권력과 금전과 미색앞에 세워보는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 무지경일지라도 자기를 제어할줄 아는데서 그 사람의 총명의 도(度)가 금그어지기때문이다.     총명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 더는 총명이라고 하지 않고 지혜라 이름한다. 총명은 대개 선천적이고 지혜는 후천적인것으로서 닦는다고 한다. 지혜는 마음에서 비롯되는것이기에 “혜출심생(慧出心生)” 이라 한다. 총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잘 보아내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적으로 총명하지만 총명한사람이라 해서 다가 지혜로운 사람인것이 아니다. 총명이 곧 지혜로 되지는 않기때문이다.     세상에 총명한 사람은 많지만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드물다. 지혜에는 한계가 없으나 총명의 도(度)에도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태산에서 재채기를 한번 하면 희말라야산에 12급태풍이 불어친다는 권세가들은 한자리 했으니 총명하다 할것이요 검은 돈이라도 억만금을 챙겨두었으니 과시 “지혜롭다”고 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총명이 도를 넘으면 우직함에 이른다. 례컨대 자동차로 실어낼만큼 돈을 끌어모아 쌓아두어 콤태기가 끼고있는데도 그냥 냠냠하는 지경이면 과연 총명한 자일가?     지혜는 분석, 판단능력, 발명창조능력이라고 한다. 지(智)는 날마다 지식이 넓어지고 증장한다는 의미이고 혜(慧)는 하나의 마음에 땅바닥을 절반 쓴다는 형상으로서 그 위에 풍성할 풍자가 두개나 놓여있는 형상이다. 지혜가 없다면 총명은 령혼이 없게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에 대해 깨득한것이 많고 깊으므로 심성이 바르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조금 바보처럼 보인다.     장자는 “聪明过头,使人忘记大宁)”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대녕”인즉 자연을 가리킨다. 자연은 곧 섭리로서 총명이 도를 넘으면 오히려 심령을 상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한도가 없으므로 스스로 재화를 자초하게 되여졌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탐욕은 본성이 아니라 모종 환경에서 사욕이 팽창되면서 생성된 일종의 불건전한 심리일뿐이다. 무릇 욕망은 개체 나아가서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수 있지만 탐욕은 만악의 근원으로 사람들을 아주 쉽게 죄악의 심연에로 밀어넣거나 다시 불귀의 저승길로 떠민다.     옛글에 이르기를 “탐욕은 불과 같아서 제때에 끄지 않으면 자신을 태우게 되고 욕망은 물과 같아서 제때에 막지 않으면 자신이 익사하게 된다.”고 하였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불의지재를 모은끝에 자족하다가 마침내 불귀객이 되여질것은 필연적이다. 눈감고 “야옹”하든 귀막고 방울훔치든, 종이로 불을 싸든 일시 소총명한자의 기량일뿐이다. 아니그런가?     일세영달할듯 떵떵거리다가 결국 처자식, 손군들마저 휘말아감고 철창행을 한 수많은 락마관들의 끝장에서 총명이나 지혜로움을 론할 건덕지가 있을것인가? 비참 그 자체일뿐이다. 결국 패가망신하고 죽게 되여서야 후회막급해서 눈물코물 쥐여짜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떠오르는것인즉 “早知今日,何必当初啊!”이다.     소총명에 양양자득다보니 지극히 지혜롭지 못한 탐관오리들이 지천이 된것은 주요하게 제도에서 비롯된것이라고 지자들이 입을 모으고있다. 탐관들은 제도의 리익을 본 총명자들면서도 결국 좋은 끝장이 없는 “근시안”들이다. 부정축재할 기회가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다가 들통나는것은 소수이니 용왕매진하는 전투정신을 계승하지 않을수 있으랴. 락마관들의 립장에서는 비리성적인 제도하에서 리성적행위라고 인식하기에 부정축재하지 않는자야말로 바보이고 렴결이야말로 비리성적이라 한다.     기실 락마관들이야말로 소총명자도 아니다. 파하지 않은 연회란 없고 깨지 않는 미몽이란 없다는것은 이미 깨뜨릴수 없는 계률임을 알면서도 이판사판했다면 더 이를데없는 바보들이다. 잡히면 그렇게 목숨걸고 끌어모은 루만금이 국고에 들어가니 산다해도 가슴앓이로 괴로울것이요 만약 황천길에 오른다면 통탄에 목이 멜것이다. 사람을 수자 1일에 비길진대 권력, 금전, 미색, 명예는 0이다. 1자가 무지러졌다면 그뒤에 0이 아무리 많던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짜 총명한 사람은 인생마당에 일체 사물은 각자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총명한 사람은 금전과 재부는 단지 수단일뿐 목적이 아니라는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에 목숨까지 걸지 않는다. 총명한자는 일시적인 쾌감이 장구하게 만족시킬수 없다는 도리를 잘 알고있으며 인생에서 사악의 유혹을 피할수 없고 언젠가는 잃게 되고 생로병사의 섭리를 어길수 없음을 알기에 얻기만 하려고 악바리질 하지 않는다.     그런데 락마관들이 탐욕의 포로가 되여 철창속에 들어앉게 되였으니 소총명이 오히려 그 자신을 잡은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호박을 쓰고 돼지굴에 들어가는 수준의 총명, 지혜라고 한다면 아마 노발대발할것이다. 길길이 뛰든말든 각설하고, 부정축재 하노매라 스스로 총명의 과인함에 만복의 배를 어루쓸겠지만 역시나 “두고 봐야지!” 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니 유감천만이 아닌가?     사람이 량심과 도덕의 계선을 넘으면 더는 리지가 도망치며 지혜마저 상실하게 된다. 지혜에서 혜가 뜻하는 의미는 깊고 오묘한바 지식은 오가 잡탕에 형형색색이여서 우리의 마음을 혼탁하게 하는바 쓸데없는것을 쓸어내여 마음의 골방을 깨끗히 하라는 의미이다. 정판교의“聪明难,糊涂更难”이라는 말에서 “糊涂” 는 지헤로운 어리숙함 을 이르는것으로서 아무나 터득하는것이 아니나 경세제언임에는 틀림없다.     조금 탈절된 비유를 해보자. 콩나물은 저저 건실하게 자라려고 애쓸것이다. 그런데 굵기와 가늘음, 길고 짧음은 그 자신으로서는 어찌할수 없다. 인생마당도 콩나물시루와 같고 인간은 각개의 콩나물처럼 저저 빼여나려 하고 월등하게 살려고 한다. 그것은 인지상정으로서 나무랄바가 아니나 재주를 쓰다가 메주를 쓴다는 속어처럼 남들보다 총명한체 하다가는 랑패보기가 일쑤이다. 세상만물에 한계가 있듯이 인간의 총명에도 극한이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총명의 도(度)란 금그어진것이 없다고 하리로다.                                                                                      2015년 6월 30일
885    진언수상록 88) 작가를 말하다 댓글:  조회:2235  추천:1  2018-07-21
                                                        작가를 말하다                                                                                                     진 언       작가란 무어냐? 문헌재료에 의하면 오늘날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되여있는 작가란 자초에는 가무를 관리하는 치가(治家)의 의미였다. 이 말이 서책에 수록된 첫사례는 《삼국지,양희전(三国志·杨戏传)》인데“请为明公作家譬之”《晋书·食货志,“(汉)桓帝不能作家,曾无私蓄。”이였다. 여기서 3국시기로부터 진(晋) 때까지는 “작가”란 “치가”를 가리키였다는것을 설명하고있다. 한조의 항제는 등극하기 이전까지 청빈한 생활을 하였기에 치가에 재산을 모을줄 잘 모르다보니 축재하지 못했다고 한다.    “작가”란 개념이 지금의 뜻으로 쓰인것은 당조때부터였다. 북송의 리방찬 (李防 撰)의《태평광기(太平广记)》에“唐宰相王好与人作碑志,有送润毫(酬金)者,误叩左丞王维门,维曰:‘大作家在那边。’”라고 기재되여있다. 바로 당송시기에 문학예술상 에서 성과가 탁월한 자를“작가”라고 호칭한 유래이다. 이는 성당 (盛唐时) 시기에 선 출해 낸 “작가”들로는 섬서(秦) 산서(晋)인들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작가라는 이 단어가 연변된 과정을 본다면 작가와“작자(作者)”의 구별점은 이 룩한 성취와 가지고 있는 자력(资历)에서 비롯된것이다. 무릇 저작이 있으면 모두 “작자”라고 칭할수 있으나 꼭 작가인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미 일정하게 명망을 가진 작자로서 문학계에서 확실히 공인해야 한다.      창작하는 전문 분야에 따라 구분하는 소설가, 산문가, 시인, 극작가, 문학리론가, 문학평론가 등을 통털어 작가라고 부른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문학가라는 호칭도 있는데 상술한 쟝르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일정한 수량과 가치있는 작품집을 발표하고 일정하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개념의 뜻풀이는 이만 접고, 문학적으로, 상징적으로 말할 때 작가란 과연 무슨 사람일가? 응당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현실을 꿈처럼 묘사하여 사람들더러 읽게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현실”이란 곧 작가가 작품에서 반영하려는 취지이다. 여기서“꿈”이란 작가의 문필의 결과 즉 작품이 가지는 미학가치이다.      작가는 무엇때문에 한사코 창작에 열중하는가? 두말할것없이 사람들, 특히 지성적인 독자들에게 읽혀지게 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작가는 늘 독자의 마음을 앞세우고 창작의 길을 떠나야 한다. 물론 작자의 마음은 하나로 융합되여야 할 전제를 가진다. 비유하건대 찢어진 두 마음이 부딪쳤을 때 량자가 하나로 엉켜서 완미한 마음으로 될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명백한것은 작가의 마음은 진지해야 한다는것이다.      흔히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을 써내면 문인이라고 할수는 있되 엄밀하게 말해 그 모두를 작가라고 부를수는 없다. 써낸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죽고나서야 명성을 떨치는 작가도 있다. 례하여 카프카는 죽을때까지 보험국에서 일 했지만 작가소리는 재대로 듣지 못했다. 죽고나서 20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글의 발견되여 대문호소리를 듣게 되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또 어떤가? 그녀가 죽은후 서랍장에 차곡차곡 챙겨져있던 약 2천여수의 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녀를 시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것은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아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라는것이다. 마치 로동벌이 꿀을 빚는 일과 같다고할가,     운이 좋아 당대에 작가로서 대접을 받을수도 있다. 반대로 죽을때까지 아무도 자신의 글을 읽지 않을지 모른다. 만약 그런것에 신경을 앞세우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작가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엄밀하게 말해 그런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타산에 밝은 글쟁이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오늘날 문학이 열광적이던 독자들에게서 소외당하여 침체상태에 빠진것은 치렬한 작가정신의 부재에서 기인된것이다. 난해할수록 좋은 시라고 주장하며 자기네끼리 북 치고 장구치니 독자들에게서 소외당하지 않을리 없다. 그리하여 문학의 호황기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니와 이제 회생하기도 망연하게 되였다.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많은 작품을 써내다니 참 글재간이 좋으시네요”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피상적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창조적인 글을 단순히 문장을 잘 엮는 재간으로 쓸수 있을가? 하긴 기준도 명백하지 않은 글재간도 있어야 하지만 단순히 “글재간”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것이 시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문학작품은 철두철 미 인간사상의 예술화활동, 생명연소의 산물이기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초행길이다. 갈래갈래 인생길에 어떤이는 작가의 길을 선택한 다. 인생길도 기구하지만 작가의 길은 더구나 파란만장할수밖에 없다. 작가의 인생길은 남다른 바탕색을 가지게 된다. 그 바탕색의 기본색은 창작이다. 인생고에서 얻은 풍부한 체험이 창작의 밑거름이 된다.     작가의 인생려정과 수련은 짓밟힐수 없다. 불행이 작가를 낳고 분노가 시인은 낳는다는 말이 널리 인용되고 있듯이 처음부터 복속에서 작가로 성장한 사람보다 고난 의 려정을 걸으며 작가로 성장한 사람들이 더 많다. 례하면 쎄르반떼스나 스탕달, 고리끼같은 대문호들의 작가의 길은 숙명인듯 다 인생의 저곡에서 시작되였다.     진정한 작가는 아는것이 많아야 할뿐더러 보통사람들보다 독특한 작가적정신이 수립되여 있어야 한다. 작가정신이란 단순개념이 아니라 범주이다. 말하자면 작가정신에 포괄된 내함이 다종다양하고 다층차적이라는것이다. 작가정신은 작가의 본령이면서도 작가적자질의 핵심이다. 조금 추상적인 표현일지 모르나 문학을 목숨처럼 여기는 치렬한 작가적태도와 작가의식, 그리고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작가, 시인이 왜 그런것들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것이 이들의 공통된 가치판이 다. 그런 세속적인 사상에서 가슴을 울리고 납함이 나올수 없다. 한부의 소설에서 주요한것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설속에 스며있는 작가의 사상이다. 여기서 “사상”이란 철학서에 론술하는 사상이 아니라 생활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감수와 사고와 견해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준다. 그러면서 문학은 생명의 직각이며 생명과 생활이 마주쳤을 때 터져나오는 개탄이라고 자답하기도 한다. 보통사람의 탄식은 한숨을 토하는것에 그치지만 작가의 탄식은 사상을 연소키는 생명의 소모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아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창작에 몰입하지만 까다로운 독자들과의 대화를 준비해야 하기에 창작에 열중할 때 고독을 모른다.     만약 매 한편의 작품이 급공근리에 매달린것이면 일컬어 글재주로 만든것이여서 너무 심심해 책장을 뒤적이는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되여질뿐이다. 만약 조류와 경향에 영합하여 작가정신이 굴절될 때 순수 문학을 위한 문학인이 된다. 작가의 심령은 시종일관 거짓되지 않아야 한다.     작가가 창작 이외의 일에 너무 관심을 쏟으면 기본품성을 잃고만다. 서구의 묵은 문학사조들을 새조류마냥 받들어 모시고 가급적으로 완벽하게 닮아보려 하거나 문인상경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패거리를 뭇고 명리(名利)를 앞세우는 작가들, 현실과 독자들의 취향에 관심이 없는 작가들은 필경 랭담한 독자들만 만나게 될것이다.                                                                                 2015년 7월 30일    
884    진언수상록 85)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 댓글:  조회:2723  추천:0  2018-07-19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                                                                       진 언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뺀다는 말은 타곳으로부터 들어온 사람이 본래부터 있던 사람을 내쫓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속담이다. 속담은 속담이고, 아닌게 아니라 시끌벅적 붐비며 사는 지구촌, 날로 치렬해지는 경쟁시대에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경우가 더구나 비일비재이다.     새학기 한국어글쓰기 훈련문제집을 만들다가 한편의 글이 눈에 띄였는데 저도 모르게 생각의 이랑들이 물결친다. 원 문장의 골자는 이러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도입종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예전엔 청개구리가 울던 연못에 요즘은 미국에서 건너온 황소개구리가 들어앉아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삼키고 있다. 어찌나 먹성이 좋은지 심지어는 우리 토종 개구리들을 먹고 살던 뱀까지 잡아 먹는다. 토종 물고기 역시 미국에서 들여온 블루길에게 빼앗기고 있다. 한마디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셈이다. 이들이 어떻게 자기 나라보다 남의 나라에서 더 잘 살게 된 것일까?》     훈련문제를 만들기 위해 거두절미한 토막글이지만 가히 앞뒤를 가늠하고 나름대로 내용을 류추해 낼수 있다. 한국에서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뱀까지 잡아먹는다 는 독종황소개구리를 수입하여 본토배기를 못살게굴고 불루길인지 하는것마저 들여 와서 토종물고기마저 침탈당하게 만들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배없지만 결코 생태 평형을 잡느라고 한 선구자적인 짓거리는 아닌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도 다른 지역의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미국종이란데서 련상이 왜지밭으로 갈수밖에 없다. 미국이란 나라가 바로 력사상 굴러온돌이 박힌돌을 빼던진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 나라가 아닌가. 서구의 오가잡탕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산토끼나 노루를 잡듯이 토착민 인디안인을 쫓아다니며 비피린 학살을 감행하고 1억의 인디안인의 선혈로 걸구어진 땅에 흑인노예들의 피땀으로 부를 쌓고 그우에 세운 나라이요 이웃나라의 령토를 마구잡이로 강점하여 배를 키워온 나라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굴러온돌이 박힌돌을 뺀다는 속담정도기 아닌 강탈의 기록이다.     현시대에 들어와서 더구나 세계 (헌병)이 되여진 그들은 지구촌 곳곳을 포탄으로 쑥밭을 만들고 총칼로 들쑤시고 다니며 굴러온돌이 박힌돌을 빼는 속담에 담긴 철학을 멋지게 체현시키고있다. 아닌가? 그건 그들의 힘을 론리로 보여주는 장거라고 할세 거기에 북치고 장구치는 추종국들은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은가?     이런 한단락의 글도 발취하였다.《영어만 잘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에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배워서 나쁠 것 없고, 영어는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차원을 떠나 반드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한글이다. 한술 더 떠 일본을 따라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영어를 들여오는 일은 우리 개구리를 돌보지 않은 채 황소 개구리를 들여온 우를 또다시 범하는 것이다.》           참으로 지성인다운 명지한 론단이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의《한국어》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정도가 아니고 바로 왕모래를 뿌린것처럼 껄끄럽기가 말이 아니게 영어를 섞어쓰는데 사대주의인지 맹종인지 알수 없다. 국어가 살아야 산국민이 있다 는 말은 결코 새롭거나 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영어에 대한 굴종의식이 국가적인것이라면 멀지않아 한국어가 오히려 영어단어체계에서 기장밥에 열콩만치나 되지 않을가 우려된다. 결코 기나라사람의 하늘걱정이 아닐듯싶다.     천리방뚝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속담이 있던가, 한국어에 외래어가 하나둘 잠식하면서부터 멋삼아 쓰더니 지금은 외래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무슨 말이 아니되는 듯이 완전히 시대풍조로 되였으니 잘되여가는 모양인가? 아니면…세종대왕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글이 그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글과 말이 되였다.     세계의 모든 문자를 과학성, 합리성, 독창성 등 여러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 순위를 정하였는데 1위를 차지한 언어가 우리 글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수한 글을 가진 민족으로서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더사랑하고 자랑하며 옳바르게 사용해야 함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간판들은 외래어로 홍수를 이루고 입고쓰는 물건들의 상표역시 외래어들뿐이란다.     지자체의 구호도, 관공서이름도, 위정자들의 이름까지도 영어로 표기하여 부른다니 참으로 사이비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언어에서 주체적립장을 살리는 길만이 민족적특성을 살리는 길이다. 언어의 민족적특성을 살리는것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키워주고 민족문화건설의 무기로서의 언어의 기능과 역할을 높이기 위해 나서는 기징 절실한 요구이기도 하다.     새로운 문물과 문명의 류입과 함께 외래어가 애용되는것은 시대의 조류인가? 미국제면 무엇이나 좋다는 그런 선입감이 한국인의 잠재의식속에 굳어져서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사용하는것인가? 물론, 국제화시대에 순수한 우리 말 우리것만을 고집 하는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우리 말로 표현할수 있는것들은 우리 말로 구사하면 더욱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세계화의 사조라해서 영어일체화에 매달린다면 민족자멸을 자청하는것같다. 과거 일제놈들이 왜 조선어말살정책을 선행시켰는가에 대해 얼핏 돌이켜보면 언어문제의 엄중성이 확실해진다.     외래어를 우리 말로 순화해서 사용하는것은 언어를 가꾸고 발전시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외래어람용을 자제하고 우리 말과 글을 애용하는 바른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라고 호소하는바이다. 그대로 쓸수 밖에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외래어의 범람은 자칫 미국의 황소개구리나 불루기처럼 우리 말을 하나하나 삼키여 민족언어의 고유성까지 삼키울지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     언어뿐인가? 한국에서는 이제 미국을 빼놓고 이야기하거나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게 되여있다고 한다. 도서관을 채워놓은 책들이나 생활비품들도 미국입김을 벗어날수 없게 되였다니 영어교육 붐이 일고있는 나라들중에서도 거의 병적이라고 할만큼 영어에 우려되는 리유는 충분하다. 한류는 밖으로 불어나가고 미국바람이 반도남부를 휩쓸고있다. 한국의 채널대부분을 차지하고있는 미국드라마들과 영어일색인 상표와 상품명들이 한국인의 뼈속깊이 미국문화가 침투해있음을 말해준다.     영어열기, 다문화가정, 서구형미인에 대한 열망이 현실로 되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굴러온 돌을 환영하는 자세인듯싶고 한국사람들은 거개 “미국병”이 골수에 사무친것같다. 단순히 미국문화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나타내는듯한 단어이지만 단군민족의 나라를 지키려면 당장 치유해야 할 병임에는 틀림없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미국문화를 한 두사람의 힘으로 막을수 있겠는가? 물론 절대적인 배척은 불가하지만 비판적인 수용을 한다면 분명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것이다.     미국의 목적의도적인 문화상품임은 이미 눈에 뻔히 보인다.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실용주의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주도하기에 교육도 미국의 실용주의교육을 답습하고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서도, 언젠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비극이 오지않도록 미리 대책을 마련하는 각도에서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가 파악하는것은 민족문화발전에 해롭지는 않을것이다.                           2011년 2월 20일 (황도에서)
883    동시의 생명선ㅡ진실성 댓글:  조회:2690  추천:0  2018-07-09
                                                    동시의 생명선ㅡ진실성                                           김견작가의 동시집《기러기가족》을 두고       동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는것은 동심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려는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정의되고 있는바 보통 동시란 어린이들의 생활에서 포착한 어린이다운 심리와 감정을 제재로 하여 어른이 어린이를 위하여 쓴 시를 이른다. 어린이가 쓴 동시와 성인이 목적, 의도적으로 지은 동시를 다 동시의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여기서는 어른이 쓴 어린이들을 위해 쓴 동시에 초점을 맞춘다.     동심세계란 무엇인가?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인간 원형질적인 어린이들 특유의 세계이다. 이런 연유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동심세계를 제대로 투시해야 동시다운 동시를 지을수 있음이 자명해진다. 물론 생동한 동심적 예술경지에 이르려면 상상의 날개를 펼쳐야 함은 두말할것 없다. 시인은 리성적론리를 초월하는 상상력으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고 정서를 발현시킨다. 여기서 새로운 현상을 만든다는것은 대상에 생명을 부여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 낸다는 뜻이다.     그 경우, 시인은 흔히 련상의 힘을 입어 재생적 상상력이나 어떤 련상의 질서에도 기대지 않는 생산적 상상력을 토대로 경이로운 새로움을 창조한다. 동시가 참신하고 기특한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서술과 입말체 대화조의 서술에 의하여 아이들의 심리세계를 표방할 때, 시적 긴장이나 함축미를 상실하고 시적진실마저 외면하게 된다. 결국 동시의 성인화는 동시의 속성마저 색바래게 하고 동시의 리념화는 동시의 본체마저 잃게 만든다.     아무리 어린이를 위한 시이고 어린이가 쉽게 리해할수 있는 글이라고 다 동시가 되는것은 아니다. 그리고 동시가 비록 소재나 제재, 배경, 언어 등이 단순하고 쉬운 용어를 사용했다 할지라도 시속에 어린이만의 정서와 사상이 비틀어져 있다면 동시가 못된다. 동시창작에서 어린이를 생각하며 어린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만이 느낄수 있는 상상세계를 동심적인 언어를 구사하는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무릇 동시의 1차적인 생명은 어린이들이 알고있고 사용하고 있는 핍진한 아동언어의 구사에 있다. 시의 언어는 고도로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만을 사용한다. 동시도 사물, 현상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가능한 정도로 합목적인 상징과 은유 등의 기법을 총동원하여 이미지를 창조할뿐이다. 그런만큼 동시의 언어는 마음속에 심상 즉 그림을 만들어낸다. 동시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그림은 어린이의 감각에 호소하여 직접적인 이미지와 간접적인 이미지를 창조한다.     시인이 어떠한 사물을 여러 감각기관을 통해 리해하도록 묘사할 때 이러한 이미지를 직접적이라고 한다. 모든 문학장치를 뛰여넘어 시는 어떤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바 "맞아, 바로 그거야!' 라고 찬탄하게 하면서 경이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하다면 좋은 동시란 어떤 동시를 기준할가?     필자는 동시의 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를 시에서 시사되고 있는 진실성에 둔다. 동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이 때 그림의 소재가 되는것은 사실적인 풍경일수도 있고 생활의 양상일 수도 있으며 마음에 떠오른 심상일수도 있겠다. 눈과 마음을 통해 다가온 감흥을 시인은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그려낸다. 이 때 그 그림을 은유적이면서도 진실하게 잘 그려낸 동시를 나는 좋은 동시라 단정한다.     기성된 문학리론에서 시란 고도로 함축되고 선택된 언어로 소리와 이미지의 감동을 노래하는 경이로운 문학의 장르라고 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동시를 정의하면 ‘동시란 고도의 함축되고 선택된 언어로, 소리와 이미지의 감동을 노래하는 어린이를 위한 문학의 독특한 장르이다.     그러한 정의 속에 보편적으로 강조되고 있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시의 진실성이다. 동시란 원초적으로 철저히 동심에 바탕을 둔 시이다. 발상의 동심성과 표현의 단순성, 간명성은 동시의 요체라고 한다면 진실성은 동시의 생명선이라 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적 발상이나 관념적 진술에서 해탈되지 못하면 동시다운 동시로 되지 못할것은 물론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생활양상이 달라지는만큼 아이들의 정신세계, 동심세계도 확연히 달라지기에 그런 문화현상을 진실하게 파악하고 동시로 형상화 하는 일은 현시대 동시 시인들의 새로운 과제로 되여졌다. 아래에 김 견작가의 동시 “암 걸린 아빠, 엄마”를 읽어보자.                           암 걸린 아빠, 엄마                           몇해 전만 해도                        우리 집 왕이였는데…                                              엄마 아빠 모두                        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놈이 나타난 뒤로                        보릿자루신세 돼버린 나                           내가 뭐라 하면 건성건성                        들었는지 말았는지 하다가도                          그놈 보채는 소리만 들리면                        허겁겁, 키득키득, 하하호호…                          휴~대책없는 아빠 엄마!                        폰암 걸린 아빠 엄마!!       전통적인 동시들에 서정은 농경문화시대의 서정이 중심이였다면 오늘 이 시대에 들어서서 어린이들은 새로운,것 변화된것에 대한 서정이 중심이 되여있으므로  어른들이 쓰는 시와 어린이들의 생활감정이 많이 근접되고있다. 현대에 와서 어린이를 위한 시에도 현대문명현상에서 발생된 소재를 다루는 시인들이 더러 있지만 김견 작가의 동시 “암 걸린아빠, 엄마”는 부모자식간은 물론 부부사이에 교감마저 뒤로 밀어버리고만 스마폰시대의 병페를 꼬집고 있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발견이라 아니할수 없다. 로봇트,컴퓨터 스마폰 등 다양한 오락을 비롯해서 어린이들이 새 감각, 새 이미지의 충격을 찾아 날로 그 유혹에 코를 꿰여 자기를 잃는 현실임에랴     좋은 동시들은 대개 단순성에서 오는 힘을 가지고있다. 그것들은 몇개의 언어들을 가지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을 보여준다. 이처럼 좋게 느껴지는 동시들의 시어는 대부분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직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기때문에 그 이미지가 그리는 형상은 아주 선명하다. 요란한 언어를 동원했는데 그림이 안 그려진다면 그건 언어를 랑비한것과 같다. 김견작가의 “얄미운 거미”를 음미해 보자.                                   “얄미운 거미”                               엄마 아빠 얼굴엔                             거미 한 마리                             숨어있대요                               내가 애먹일 때마다                             거미줄 가득 쳐놓고                             살금 사라지기에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예쁜 짓만 했더니                               아이고,                             이를 어떡해?!                               활짝 웃으시는                             엄마 아빠 얼굴에                               더 많은 거미줄 쳐놓고                             살금 사라지는                             얄미운 거미!!       이 동시를 보면서 느끼게 된것은 시가 생동한 그림을 대신할만큼 회화적이라는것이다. 삽화에서 쉽게 련상되지만 또 다른 의미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것은 이 시에 쓰인 시어가 놀랄만큼 회화적이기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아주 단순한 몇마디 시어로 부모가 늙어가는 정경을 걱정하고 있다. 소박한 시어는 아이가 재치있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련에서 엄마, 아빠가 활짝 웃어도 거미줄같은 주름살이 얼기설기 얽힌다는 진술은 어린이답지만 탁월한 발견이다. 그것을 독자들이 모르는것은 아 니다. 그저 례사롭게 넘기고 눈여겨보지 않았던것일뿐이다. 시인이 그걸 발견한것인데 그걸 진술하는 시어는 아주 단순한 말로 되여있다. 이 동시에는 화려한 수사가 없지만 서정적주인공의 아름다운 심경이 진실하게 펼쳐진다.                                   달                             내 동생은                           못 말리는 먹보                             조각달 보면                           바나나 먹겠다                             반달이 뜨면                           멜론 내놓으라                           생떼질                             보름달 보면                           피자 먹겠다                           성화래요.        김견작가의 동시 “달”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아이들의 본성에 맞게 씌여진 시다. 이 시는 억지스러운 착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시어도 진실하게 구사되고있다. 이 시는 아이들 생활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시라기보다 아이들 마음속에 떠오를수 있는 심상을 그린 시라고 할수 있는데 시인은 지어낸 관념에 의탁하고 있다는 의혹을 주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에서 가히 그려질수 있는 그림으로 다가온다. 동시 “감기”도 동심에서만 생길수 있는 심리현상을 잘 포착하였다고 할수 있다.     그림이 구체적이라는것은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것이고 그것은 또한 독자들의 눈길을 붙잡아 둘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겸하여 말하건대 이 시에는 자연스러운 률동감이 느껴지는바 긴장 (들숨)과 이완(날숨)이 적절히 반복되고 있다. 구체적인 그림과 자연스러운 리듬의 어울림은 이 시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한 식구로 어울려 사는 목숨들간의 조화를 노래하고 있는데, 그것이 또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동생과 누나(형님)사이에 진행되는 아름다운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어른이 동시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른이 도로 아이가 될수 없고 어른이 인지한 동심세계가 곧 아이들의 동심과 등호로 될수 없기때문이다. 그 어려움은 아 이들의 마음, 생각, 꿈이 곧 나의 꿈이 될 때에만 잘 풀린다     주제적인 면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인간과 자연속에 숨어있는 새로운 현상과 진리를 발견하게 하고 유익한 계발을 받게 하며 독자 수용적인 면으로는 아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인간적 정서를 풍부하게 길러주는 것이 동시의 속성이다. 더 부연한다면 동시다운 동시는 아이들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감동을 받게 되며 인간적인 정서를 함양하고 흥미있는 경험을 쌓게 하는데 시의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자면 아이들의 상상력이 미치는 진실한 동심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흥미진진하게 시속에 담겨진 의미를 발굴하고 사색하게 한다.     동시짓기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동시인만큼 단순성과 명쾌성이다. 동시에는 어린이들에게 있을수 있는 사실적인 생활내용이나 경험이 들어있어야 한다. 동심적인 상상력이 나래치는 무한한 세계를 펼쳐보이려 해도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드러나야 하는바 그것은 동심적인 표현으로서만 구현될수 있다.     김견의 동시들중에서 “기러기 가족”을 우선 례로 들고싶다.                             기럭기럭 저기러기야                         왜 그렇게 슬피 우니                           기약없는 기다림에                         목만 점점 길어졌네                           외기러기 아빠 엄마                         우린 언제 같이 사니                           하염없이 기다리다                         기러기잠 들고 마네                “기러기 가족”전문        이 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처하고 있는 가정현실에서 종자를 잡았는데 사실 출국붐이 일면서 우리 조선족 가정들에 거의 보편적이다싶이 된 출국붐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조부모 혹은 친척들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가? 부모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심리세계에 주제는 “그리움”,“기다림”,“눈물”이라 해도 틀린말은 아닐것이다. 기러기아빠, 기러기엄마, 그리고 부당하게 설음을 짓씹으며 커야 하는 새끼기러기들의 공통된 심리가 아닌가!     시인은 시상전개에서 많은 아이들에게 존재하는 리별의 아픔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그러면서 수수께끼같이 까다롭지 않게 인간정서의 보편적인 뉴앙스를 시사한다. 이 동시는 현실생활에 존재하는 사실과 진리를 담고있으며 다시 한번 아이들의 아픈 마음을 형상적으로 보여주기에 동시의 생명선ㅡ진실성으로 하여 매력적이 된것이다. 동시는 이처럼 자연과 인간생활속에 숨겨진 진실을 말하면서도 교육성을 넘어 인간생활의 밝고 어두운 면을 직시하면서 자시의 인생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졸문의 주제와 조금 탈절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다. 말하자면 동시에서의 음악성이다. 다 알다싶이 시는 음악성을 추구하는 문학이다. 시에서는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처럼 규칙적인 말의 가락이 느껴진다.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말의 가락을 운률이라고 하는데, 이런 음악적인 요소는 시의 의미와 련결되어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김견작가의 동시는 비록 정형률을 추구하지 않고 있지만 시의 리듬, 음악성에 많이 류의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시냇물                        시냇물은 왜                      돌~돌~돌~                      흐르는 걸까?                        돌~돌~                      돌밭 위를                      걷기 때문이지                        돌밭 위를                      걷다보면                      발이 아플텐데…                        피해 갈 수                      없을 바에야                        돌~돌~                      노래하며                      흐르는게 낫지                          보다싶이 언어의 규칙적인 배렬이 아닌 시적정서의 내적흐름에 의해 형성된 운률미를 다분히 느끼게 된다. 동시는 어떤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것이 아니라 생명현상 그대로 보여주어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노래가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동시는 노래하는 아이들의 그림이요 그림을 그리는 동심의 음악인것이다. 시는 물론 특히 동시는 시어에 선명한 선이 있고 색채가 있는 언어야 하며 리듬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긴 분석을 접고 화제를 돌리려 한다. 문학평론을 문학비평이라고도 한다. 문학비병이라면 호평으로 그칠것이 아니라 작품의 부족점도 지적하여 작가의 금후 창작에 유조케 하는것도 마땅하리라 사료된다. 50수의 동시들을 읽고 좋은 감수를 받았지만 허심탄회하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고 까밝히고 싶다.     이를테면 많은 동시작가들이 시종 피할 길 없는 난제인데 즉 동심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성인화이다. 김견작가의 수작들속에서도 성인화경향이 잘 극복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례하면 “고국지도”,“죽겠다”, “1등미인”등 몇수의 시들에서 시인의 리념화, 성인화경향이 엿보인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좀더 류의해야 할 몇가지도 짚고 넘어가려 한다.  “기러기 가족”에서 “기약없는”, “백두의 겨울”에서 “일진한풍”, “봄그림”에서 “뜸들이다”, “겨울나무”에서 “오캐스트라 연주”, “검정나비”에서 “까만 연미복”등 시어들은 아이들에게 생경하게 느껴질 것이다.     일언이페지하고, 작자가 서문에서 토로했듯이 소설가, 번역가로 활약하던 그가 불혹의 나이에 생뚱같이 “동심에로의 회귀”를 표방하여 첫동시집을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 갓마흔에 첫보선이랄가, 마흔에 만득자라고 할가, 작자의 말처럼 동심으로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쉽게 살고 싶은 마음이라도 동시습작품 치고는 결코 기름떡을 구워내듯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운 일이 아니래도 이미 동심에 깊숙히 빠져든 이상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어린이들의 언어로 보다 진실하게 동심세계를 재현시키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그래서 충심으로부터 응원을 보내는 바이다.                               2018년 7월 7일        2018년 8ㅡ9호 (통권 86호)                                    
882    (진언수상록 85) 불편한 계승 댓글:  조회:2875  추천:0  2018-06-30
                                                    불편한 계승                                                         진 언        희랍신화에 아버지를 따라 하려다가 제우스의 벼락을 맞은 이야기가 있다. 태양 마차를 몰던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아버지에게 그 마차에 오를수 있게 해달라고 조른다. 헬리오스는 매일 아침 태양마차를 몰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을 가로 질주했다. 고대희랍인들은 해가 뜨고 지는것을 태양신 헬리오스가 태양마차를 몰고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헬리오스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파에톤은 “아버지의 마차”에 올랐다. 자신도 태양마차를 몰아아버지 못지않은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네마리 말은 파에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말이 롤러코스트처럼 요동치는 바람에 고삐를 놓치게 된다. 결국 말은 궤도를 벗어나고 말았다.     말이 낮은 궤도를 달리면 산에 불이났다. 들판은 뜨거운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메말랐다. 강에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나일강은 도망쳐 사막에 머리를 처박았다. 바다 가 마르기 시작해 포세이돈도 머리를 내밀수 없었다. 이 때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피부가 검게 변했으며 이 열기로 땅이 말라 리비아사막이 생겼다는 전설도 있다.     온통 불바다로 변해가자 대지의 녀신이 신들의 제왕 제우스에게 호소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파괴되면 옛날 “카오스”상태로 되돌아가고말테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사정했다. 제우스에게 충성한 이 땅과 이 바다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며 구원을 청했다.     파에톤이 아버지의 마차를 몰아 생긴 변고라는걸 알게 된 제우스는 우뢰를 일으켜 오른손에 벼락을 거머쥐고 태양마차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파에톤을 향해 힘껏 던졌다. 벼락을 맞은 파에톤은 거꾸로 떨어졌다. 그 모습은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류성과 같았다…파에톤은 제애비처럼 해보려다가 시행착오를 범했을뿐 사악한 계승관념이 있은것은 아니다. 당전 중국대지에서 내노라 활개치면서 사단을 일으켜 국인들의 눈총을 받는 일컬어 재벌2세대 (富二代)들의 행각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슈퍼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고의로 충돌사고를 내거나 거액이 든 은행잔고를 보란듯이 온라인에 올린다거나 쇼핑한 명품을 자랑스레 펼쳐놓고 셀카를 찍고 생일에는 유명한 걸그룹을 통째로 초청하거나… 돈자랑도 모자라 마약과 섹스파티를 하는 등등은 재벌2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급속한 산업화에 운이 틔여 부를 쌓은 갑부네 자녀들의 무분별한 소비습관과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빈축을 사고있다. 하여 도를 넘은 이들의 몰지각한 행태에 정부도 칼을 빼들었다.     눈살 찌푸리게 하는 부호2세대들의 망동은 어제 그제의 일이 아니다. 2012년 북경에서 일어난 한 차사고는 중국 신흥귀족 자녀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예고편격이다. 사건은 해외반체제 온라인들을 통해 소문이 파다하게 번졌다. 사고차량이 그 동안 중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페라리 458 스파이더 슈퍼카인데다 반라체의 젊은녀성들이 합승했다는 사실이 화제를 모았다.       현장에서 즉사한 차주인의 신원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으나 소문을 통해 23세의 링귀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졌다. 링귀는 당시 중앙통일전선공작부 부장 링지화의 아들이다. 2013년에는 푸얼다이들의 충격적인 마약, 섹스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당시 현지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휴양지 해남도의 산야해변에 정박한 요트선상에서 재 벌2세들이 생일파티를 겸한 환각파티를 벌였다. 이 자리에 불려온 모델들은 60만 원씩 받고 색을 판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최고갑부 1, 2위를 다투는 대련 만달그룹의 동사장 완건린(王健林)의 아들 왕사총도 도마에 올랐다. 그는 '왕커커'라는 이름의 애완견을 위해 개설한 웨이보에서 자신의 애견이 1400만원을 호가하는 애플 와치를 두발에 찬 사진을 올리고는 "하하, 나 새로운 시계가 생겼다. 나는 다리가 4개니까 시계도 4개를 차야하는데 4개는 너무 많은것 같아서 2개만 찼어"라며 "너희들중 누구라도 애플워치 갖고있는 사람 있니?" 라는 글을 달아 전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기사 그들이 부뚜막에서 말을 달리든 변소에서 치솔질하든 곁에서 무슨 상관이랴만 그들의 불가사이한 망언들과 행실이 말밥에 오르며 사회적 질타의 과녁이 된것은 사실이다. 개혁개방 30여년이 지난 작금에 “재벌2세대현상”은 중국의 시장문화의 결함을 드러내면서 당전의 사회발전과 청소년성장문제에 숨겨진 우환으로 되여 사회적인 중시와 사고를 불러일으킨것이다.     물론 재벌2세대란 결코 고금중외에 신선한 계층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재벌2세대현상은 역시 “중국특색”을 가짐으로써 문제가 달리 제기된것이다. 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물려준 “금자탑”의 꼭대기에 턱하니 올라앉아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은 격으로 아무런 경쟁력도, 경쟁경험도 없는 “사회정영” ,“사회강자군체” 를 형성하였 다. 그렇듯 복받은 세대들이지만 거개 진취심이란 없이 사치한 생활의 늪에서 허우적 거릴줄밖에 모르면서도 교오하고 과대망상증을 과시함으로써 중국사회, 특히는 청년들에게 지극히 나쁜 영향을 끼치고있다.     그네들이 그렇게 성장할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들이 있지만 돈으로 포장할수 없는 도덕교양의 부재, 인격교육의 결실 등에서 서방의 발달국가들에 재벌가자제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점이다. 이는 돈, 재부가 곧 귀족을 만드는것이 아님을 설명해준다. 벼락부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물려준것은 흔히 “성공학”이거나 후흑학(厚黑学)이였다. 여기서 후(厚) 낯가죽이 두꺼워야 함을 가리키고 흑(黑) 속창이 검어야 한다는것이다.     옛글에 “마음이 어질다면 벼슬할수 없고 의를 내세우면 장사를 할수 없다 (慈不 做官,义不经商)”하였듯이 재벌2세들이 그렇게 교육받았기에 당연히 책임감, 동정심, 공공정신 같은 덕목들이 결여될수밖에 없는것이다. 문제는 “재벌2세”란 한개 사회계층의 대명사가 되여진는데 있는게 아니라 일종 비정한 사회현상으로 되여 중국 사회모순을 격화시키고 있다는데 있다는것이다.     말하자면 “재벌2세현상”은 재부가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 할수 있는 언덕으로 되고 사회불공평현상의 래원이 되고 분화, 심지어는 대립을 조성하면서 날이 갈수록 극렬해졌으며 그로하여 국인들이 재부의 선의적의의를 보려하지 않게 하였다. 오로지 재부만 눈에 보이고 례의렴치가 헌발싸개가 되여짐으로써 중국전통문화속에 이른바 도의, 가정, 인륜 등 인문정신이 도전과 충격속에 뿌리채 흔들리게 된것이다.        기형적인 소비주의가 신주대지에 비정상적 소비돌풍을 일으키고있다. 재부를 중시하는것과 유일재부론은 벌써 다른 개념이다. 문질문화생활을 제고와 삶의 질을 개변하는것과 향락지상주의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돈을 분토같이 여기며 돈내를 풍기는 안하무인의 재벌2세들의 작태에 세인들이 곱게 보아줄리 없다.    재벌2세대들이 유의무의하게 끼치는 위해성은 날이 갈수록 지성인들의 우려를 가심화하고있다. 인간사회인만큼 빈부격차는 당연하다. 그러나 억만장자의 자식이라도 재부에 일종 사회적책임성이 깃들어있다는 도리를 모른다면 아무리 많은 재부를 물려받았더라도 3대까지 내려가지 못한다 (富不过三代)는것은 력대갑부들의 모종의 저질성을 시사하는게 아닐가? 불편한 계승자 파에톤을 잊지 말기를…                                                                           2015년 7월 12일
881    (진언수상록 81) 과시욕의 저 끝에는 댓글:  조회:2480  추천:0  2018-06-22
                                                        과시욕의 저 끝에는                                                                     진 언        다종다양하고 형형색색의 잡다한 인간의 욕망중에서 소유욕이 우선이라면  버금으로는 표현욕이라 할것이다. 표현욕은 식욕처럼 본능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감동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생물로 진화된것이다. 표현욕이 없는 인간은 거의 식물인과 다를배 없다. 표현욕은 고차원적 심미감정의 표현욕을 비롯해서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표현욕과 자신을 자랑하거나 뽐내여 보이고 싶은 과시욕은 별개의 문제이 다. 과시욕의 기본바탕은 허영심이다. 허영심은 대체상 류행어로 되여있는 세가지 척 (체)으로 표현되고있다. 즉 없어도 있는척(체), 모르면서도 아는척(체), 못나도 잘난척 (체)으로서 과시욕은 그냥 체체체 세가지 법보로 대활보한다.     비틀어지고 저질적인 표현욕이 밖으로 삐져나올 될 때 과시욕이 된다. 인간은 욕망없이 발전할수 없다지만 과시욕은 자신이 현재 살고있는 양상을 자랑하고 뽐내지 못한다면 비단옷 입고 밤길 가는것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자기과시야말로 개체생명의 동력이요 인생의 보람이라 여긴다. 요는 본분에 맞지 않는 과시욕으로서 남들과 달리, 혹은 남보다 더 멋진 인생을 산다는것을 드러내려는 비정상심리이다.     마침내 과시욕이 서렬화되면서 수자에 매달리게 된다. 학생은 시험점수, 어른들은 로임액수, 아빠트도 면적의 다소, 재산의 규모, 사업실적 등 모든 평가기준이 수치로 환산되고 어릴때부터 수치에 의한 서렬이 사람들이 의식화되였다. 서렬의식은 자연히 비교의식을 유발하고 마냥 앞자리를 향해 경쟁하는 에누리없는 사회구조를 형성했다.     없으면 없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소신껏 사는게 오히려  마음이 편치않게 되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체 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유식한체 하여야 하고 출중하게 더 잘난체 하려는 비교우위의식이 과시욕의 리유일진대 그렇다 고 환골탈태나 하는것이며 본래보다 인격력량이 급증이라도 되는것인가? 열백번도 아니다. 아닐뿐만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을 원래보다 형편없은 인간으로 만든다.     남의 평판을 매달려 살아가는 리유는 내심 무엇인가 부족하게 느껴져서 그 모자 람을 채우기 위해 별작(농촌사투리)을 쓰는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펄쩍 뛸것이다. 몸에 걸치는것으로부터 마냥 뽐내고 싶어서 한결같이 명품을 따지고 남보다 더 비싼 옷을 입고 고급신을 신어야만 고귀한 티가 나고 유달리 돋보일것이니 과시욕의 체현 이야말로 자아가치실현이라고 생각하는것은 참으로 못난 궁리이다.    주위의 이목에 매달리다보니 허장성세 해야하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방백계를 다하는 인간의 심성이고 보면 리해될듯도 한데 과시욕은 백해무익할뿐이다. 례하여 관내의 어떤 관리가 교통사고가 난 현장에서 눈예 띄는 고급시계를 차고 팔뚝을 내흔들다가 예민한 네티즌의 눈에 걸려 그만 호박씨를 까고있던 밑구녕이 드러나서 철창행을 한 과시욕의 주인공도 있고 사무실에 최고급담배를 쌓아놀고 피우며 재세를 부리다가 일패도지한자도 있으니 과시욕은 인간심령의 쓰레기가 아닌가?     누군들 과시욕과 등을 지고 살랴만 과시욕에 미쳐 돌아가는 자들은 참으로 허무맹랑한 동물이라 아니 할수 없다. 스스로 더 내세울게 없다는것에 안달복달하게 되면 멈추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기를 부리는 인간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광대춤을 추고 있는것같아 민망스러운데도 그 자신은 모르니 구제불능이다. 죽기전까지도 과시욕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은 제멋에 놀아대지만 기실 고달프고 불쌍한 인생이다.    요즘 인터넷마당이 시끌벅적하게 된 과시욕의 기관이 나타났다. 9월 11일 하북성《과학기술학원》의 동사장 주호진(周虎振) 씨가 군사훈련을 하는 신입생 수천명 을 운동장에 줄세워놓고 열병식 흉내를 내여 네티즌들의 빈축을 사고있다. 주씨는 흰색차에 올라서서 “학생들 안녕하십니까?”,“학생들 수고가 많습니다”라고 웨치 는 거동은 그야말로 기관이라 아니할수 없다. 난쟁이의 키자랑인가?     하긴 인구가 많은 국토라서 이런 과시욕의 절경은 문제의 학원만은 아니다. 일찍 안휘신화학원의 석수라는 원장이 “열병차” 에 올라 위엄을 떨치자 2007년에 산동성 과학기술대학교장이, 2008년에 화남농업대학교장이, 2010년에 남경의 3강학원교장 등 대단한 위인들이 자신의 존안과 위엄을 과시하였더랬다. 도토리 키재기인가, 고등 학교판 “산채열병(山寨阅兵)”이라는 장거는 경악케 하고있다.     권력이란 천성적으로 과시욕을 배태하고있는지라 대학교들에서만이 아니라 어떤 국유기업, 사영기업의 로반들도 “열병인이”박혀있는데 신입사원영접, 기업창건기념일 등에서 그들이 위풍당당함을 과시하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기업같은데 그러는것은 다 제멋에 겨운 작태라고 치부할지라도 대학들에서 그러는것은 제멋도 아니다.     고등교육이 행정화된 성과인가? “산채열병”이 풍조가 되였는데 그런 대학교 어른들은 자신이 설자리 앉을자리를 모르고 있거니와 학생이 주체라는 의식이 없기에 권세를 떨치려고 권력봉을 휘두르며 만인지상의 진미에 도취되지만 기실 다리부러진 장수가 성안에서 호통치는게 아니라면 이불안에서 활개짓하는 셈이다. 법도에도 부합되지 않는다.《중국인민해방군대렬조례》에 열병식에 대해 명확하게 해석하고 권한을 규정해 놓고있다. 무릇 어떤 대학교에서든 “열병”할 권리가 없는것이다.     이런 기관을 보고 어떤 감수가 있었다고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하나? 황소앞에서 배 크기를 자랑했다는 개구리가 련상되고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랭이가 찢어졌다는 속담이 떠올려진다. 빗나간 과시욕은 범국민적인 웃음거리만 남겼을뿐이다. 이렇듯 인간의 과시욕은 불필요한 가동작을 낳기도 한다. 권본위주의란 허풍을 떠는 비속함도 고유하고 있었던가?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흉내를 잘 내여도 사람으로 진화 하지 못하듯 흉내를 내봐야 허세이다.     순진한 학생들앞에서 여느 대학총장보다 잘나고 더 위세당당함을 뽐내고 싶던들 비길바가 따로 있고 흉내낼게 따로 있는법이다. 황차 고등학교에 령도신분이라면 특히 나의 행위가 “우러러” 받드는 학생들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게 처사하는것이 기본자세인데 영광의 위인사표(为人师表)에 별스러운 선두주자로 되려는것인가?    위인사표가 무어냐? 교원이 심령으로부터 작풍에 이르기까지, 언행으로부터 거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생의 모범이 되여야 한다는것이 위인사표이다. 그런데 언감생심 흉내면서도 “나는 이런 사람이란 말이야!”, “나는 이렇게 산다니까!”라고 하는듯 어깨를 잔뜩 높이는데 다른 사람의 감수를 알은체 하지 않는것은 자사자리고 반대로 다른 사람의 감수에 너무 올인하면 자기 학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스스로 생각하는것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말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과시욕의 만족이란 입으로 불구어놓은 고무풍선과 같다. 아롱다롱한 꽃풍선을 둥둥 띄워놓고 우주비행선이나 날린듯이 짝짝꿍치는것은 개구쟁이들의 희열이다.     도둑놈  범죄자들도 고급아파트에 살고 명품을 걸치고 비싼 차를 굴리면 품위와 격이 높아지는 지금의 인정세태라지만 본분에 맞게 처신하면 그로서의 인격가치가 매겨지는데 왜 부득부득 자신을 분장하려들가? 금은 그 자체로 빛나고 옥돌은 자랑하지 않아도 제값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야명주는 어둠속에서만 빛뿌린다. 과욕도 인간심리이지만 백해무익하다. 백해무익한 일을 사서 하는것은 멍청이들뿐이다.                                                        2015년 9월 14일
880    (진언수상록 80) 사는 기술ㅡ속임수 댓글:  조회:2529  추천:0  2018-06-20
                                               사는 기술ㅡ속임수                                                           진 언       국어사전에서는 '말'의 뜻을 '음성기호나 문자기호로 나타나는 사고(思考)의 표현 수단, 또는 그 체계'라고 풀어놓았다. 한문 표기인 언어'에 대해서도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소리나 문자 따위의 수단'이라는 무미건조한 말뜻을 해석한다. 이처럼 말과 그 상당어구가 지니는 사전적 의미를 보면,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뿐만아니라 어떤 힘을 가질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한 사람의 머리속에 생각과 마음에 담긴 감정이 입을 통해 말로 표현되는 순간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감정과 생각이 말로 바뀌어 입을 떠나는 순간 그 말은 참마음이 되여 사람을 감동시킬수도  거짓말이 되여 오도할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종종 거짓말을 하게 된다. 만약 누가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철두철미한 거짓말쟁이다. 어떤 사람이 일생동안 줄곧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의 존재 자체가 허상이다. 어떤 사람이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면 그를 내놓고 그것이 거짓말인줄을 아무도 모른다. 거짓말에도 이렇게 뉴앙스가 있게되는것이다.     세인이 다 알고있듯이 세상에서 제일 거짓말은 장사군이 밑졌다는 말과 로처녀가 시집을 안간다는 말과 늙은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라 한다. 장사군의 말은 확실히 천고의 거짓말이지만 로처녀와 늙은이의 거짓말은 아름다운 거짓말이라 할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거짓말이로되 남을 해치지 않으니 그런대로 들으면 된다.     진실한 말을 하지 않는데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우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기에 득죄하여 생존위협을 당할가봐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두려워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참말을 하지 않는데 불성실하긴 하지만 꼭 비도덕적이라고 말하기도 난처하다.     다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리익을 위하여 진실을 숨기려한다. 흔히 이런 리익은 듣는자의 리익과 일치할 때가 많다.그 경우 누구나 다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 본능을 행사하게 된다. 말하자면 거짓말을 하는것은 일종 자기 “보호술”이기도 한것이다. 객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하는것도 사회환경에 순응하는것으로서 강권에 타협하고 종용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약자의 거짓말은 비애의 일종이며 강자의 거짓말은 인간악의 일종이고 그 자체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나를 거짓말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데도 거짓말을 하는것은 그 자신의 문제로서 곧 자질에 속한 비도덕성이다.     되돌아와서 생각할 때 “민본위”사회에서 만약 매개 사람의 권리가 모두 보장받는다면 거짓말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강압이 없고 인격상 평등하다면 누가 누구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으므로 무엇을 말하고 싶으면 무엇을 말할수 있고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자기 량심을 속이지 않는 진실한 말일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핍박에에 의해 혹은 주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리익을 보호하려고 할 때 그것을 한몽둥이에 쳐엎을수 없다. 세상엔 필경 성인이 몇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말이 류행되는 사회는 그 자체에 위기를 배태하고있다. 참말을 하지 않는것이 보편화된 사회라면 필연적으로 “표면”적 사회와 ”진실”사회로 획분되기마련이다. 그리고 민초사회이든 관본위사회이든 투기분자가 끼여들 공간이 더욱 많아질것도 자명하다. 가짜의 전제가 거짓인것이다.     현시대 많은 사람들은 리익을 먼저 내세우지 무슨 인격을 내세우지 않는 물질화된 인간으로 변해있다. 민초들 사이에서 무시로 생성되는 거짓말은 인간심리의 진실문제이지만 지어먹고 참말을 하지 않는 관본위사회는 집단성거짓말의 체현으로서 곧 부패한 사회에 이르는 큰 길이다. 리성을 잃었던10년 동란시기를 겪어온  사람들은 모두 참말을 할수 없을 때 침묵을 선택할수 있다고 여긴다. 가치관상 획일된 추구는 자연히 관본위의 현실에 동조하거나 접수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민초들의 숙명이고 영원한 비애이다. 웃물의 흐림과 아랫물의 인과관계가 되는지 모르겠다.     일반 사람은 물론 관본위사회에서 관료들도 기실 진실한 말을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 법치사회가 아니라《인치(人治)》사회에서는 진실한 말을 한다는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여드는것과 같다. 진실을 말할수 있는 권리는 원래 인간에게 주어져있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뿐, 진실을 말하지 않을 권리라도 주어지면 다행이라 할것이다.     매개 사람들이 진실을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는 사회운행기제가 결핍하다면 청운에 뜻을 둔 사람은 자연히 백락ㅡ(상급)에게 발견되도록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게 될것이다. 백락이 있고 연후에 천리마가 있다고 말들한다. 백락에게 발견되여야 천리마 될수 있을뿐 아니면 천리마래도 죽은 말이 될때까지 기다려야 할것이다. 하여 상급ㅡ백락의 눈에 들려고 낯뜨거운 말도 꺼리낌없이 주어대게 되고 미사려구를 엮어대느라 자신이 지력을 총동원하게 된다. 그래도 안되면 붉은 봉투를 준비해야 한다.     무엇때문에 세상에는 동서남북, 상하좌우 처처에 거짓말이 성행하는가?사회의 재난성적인 거짓말은 민중들의 랭수마시듯 하는 거짓말을 위해성이 대단하지 않으나 위정자들이 참말을 하지 않는것은 될성부르지 못한 사회현상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것은 자고로 관본위사회에서의 일종 특징이며 진실한 모습으로서 뿌리가 깊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란 없다. 일자무식을 내놓고는 “승냥이가 왔어요”라는 이소프의 우화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우리는 세번 거짓말을  하여 돌이킬수 없는 악과를 빚은 이야기정절로 아이들을 교육하지만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역시 한편의 우화로만 기억에 남는게 관례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화속에서 장난삼아 거짓말을 한 목동을 타매할 근거를 근저로부터 잃고 있으며 자격도달자가 소수이다. 하긴 거짓말에 “선의”라는 딱지를 붙이면 그래도 시장이 있지만,     현대에 와서 성실한 사람은 미련퉁이의 동의어로 되였다. 거짓말이 더욱 성행하게 된것은 거짓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기고 실말을 하기보다 거짓말을 하면 리득이 확실하고 그만큼 상당하기때문이다. 리론상에서는 말을 듣는 자는 참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씌여있으나 거짓말은 담장가에 넝쿨처럼 무성해지고 거짓말은 온역처럼 되여 공제할수 없게 되였다.     말이란 비록 정보전달의 목적에서, 정서의 필연적인 로출로서, 내심을 감추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수단으로서의 개인의 처세이고 생명활동의 주제이지만 사회인으로서는 사회도덕의 범주를 벗어날수 없다. 결국 거짓말은 마음의 문제, 인격력량의 문제에 귀결된다. 사람은 우연히 사람이 아닐수는 있어도 한평생 사람이 아니기는 어렵다는 말처럼 수치감과 자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거짓말을 할수는 있어도 거짓말을 하루 세끼밥을 먹듯이 하며 살수는 없다. 진실한 구석이 조금도 남지 않은 사람은 그 자체로 존재의 가치가 없을뿐만아니라 존재리유마저 없게 된다.       진실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명구가 있다. 그러나 거짓말이 독초라면 그것이 자라날 옥토가 있어야 한다. 아부와 수자놀이가 류행되고있는 정계촌에서는 실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기가 이미 잠규칙이 되였다. 레닌은 “허풍치기와 거짓말은 도의상에서의 멸망이고 그것은 정치상의 멸망에로 이끌어갈것이다”라고 엄정하게 말하였다. 그의 말은 현시대의 수많은 회색리론과 근본 차원이 다른 금과옥조이지만 부단히 변하고 그냥 사잇길로 굴러가는 사회라는 이 거륜앞에서는 속수무책일듯싶다. 남을 속이는 일도 살아가는데 일종 기술이니 어찌할손가!                                                           2012년 7월 6일 
879    (진언수상록79) 내 눈에 보이는 세상 구석 댓글:  조회:2724  추천:0  2018-06-05
                                          내 눈에 보이는 세상 구석                                                             진 언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수 없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을 공중에 내놓고 싶어진다. 하긴 내눈에 보이는 인간세상에 대하여 횡설수설한다면 혹 동감을 얻을수도 있고 반대로 하찮은 글쟁이로 오지랖이 넓다고 비난할 사람들이 더 많을줄로 안다. 그러나 오래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되는바를 표백한다면 그 역시 진실한 마음이라 할것이다.     “내가 존재하므로”를 전제로 할제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근거가 생긴것이요 눈에 보이는대로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도 되는것이다. 철학자 죠지 버클리는 “물질이 인간에게 부여하는것은 물질속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실상 보이는 세상과 보는 세상의 구별도 있게 된것이다.     세상에 어섯눈을 떴을 때 세상은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새면 밝은 새날이 오듯이 흑백 두가지 색으로 인지되여 특별히 분명했고 이 대천세계에 기이하지 않은것이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눈이라도 동일한 사물에 대한 견해도 달랐다. 나자신도 내 눈에 보이는 수많은 사물도 볼 때에 따라 느낌이 달라졌다. 마치 처음 명화 “몬나리자”를 보았을 때 단아하기는 하였으나 살아있는듯한 질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후에 다시 보면 확실히 살아있는듯 생명의 활력을 느낄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롱다롱하던 동경이 현실과 마주섰을 때 특히 나의 청춘의 꿈이 철저히 부서졌다고 절감한 그때로부터 모든것의 앞뒤면, 그것의 량면성을 보아낼수 있었다. 다른 젊은은이들의 눈에는 이 세상이 아름답고 해빛찬란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물론 이 세상은 아름답지만 보는 눈길, 느끼는 마음에 따라 달리 인지될수밖에 없다.     아닌게 아니라 차차 지적으로 성숙을 다그치면서 이 세상이 회색, 일종 혼합색으로 느껴지면서 명명백백하게 안겨오는것이란 별로 없게 되였다. 세상이 혼탁해서 내눈이 혼탁해졌는지 아니면 내 눈이 혼탁해서 색안경을 낀것처럼 무엇이나 원색을 보아낼수 없는지…일찍 박지원이 하루밤에 아홉번 강을 건너며 강물소리가 각이하게 들릴수 있다고 설득력이 있게 설파하기는 했지만…     다 아는바와같이 하나의 사회는 한 시대를 담고있고 한 시대는 당시 사람들의 눈속에 비낀 사회상이 있기마련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회는 변화하고 우리들의 눈에 비낀 사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하게 된다. 이를테면 다같이 가난하기는 했지만 인심만은 훈훈했던 산촌에 “×××를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터지면서 산천 초목도 떨던 광란의 년대. 세상은 헝클어지기 시작했고 물이 흐린김에 손을 넣어 고기를 잡는 “영웅”들이 나와 우쭐렁거리는 바람에 친화성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돈이 나오는 곳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 금전만능주의 현시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저저 심리벽을 쌓아놓고 남을 쉬이 믿으려 하지 않고 경계심만 곤두세우게 되였다. 언론이 너무 민감해서인가, 아니면 이 사회가 너무 부패해져서인가 보이나니 곳곳에 락마관들의 추태요 들리나니 벼라별 추문들이라 머리가 어리벙벙할 지경이다. 물욕이 종횡무진하는 시대여서 인성, 인정마저 돈으로 말아먹게 되였는가? 사람들은 “사회대가정”이란 말을 많이도 외워왔는데 당신은 대가정의 따스함을 느끼는가?     경우와 과정이야 어찌되였든 많이 차지하게 된 사람들은, 남을 다스리는 재미가 짭짤한 기득권자들은 이 세상이 무척 살맛이 날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행복하고 쾌락한 이들은 분복대로 나름껏 쾌락하라고 하라. 그러나 세상은 밝은 곳이 있는만큼 어두운 구석이 많고 그 구석에서 한숨 쉬고 눈물짓는 사람들도 있다는것만 념두에 둔다 면 괜찮은 사람들이라 해야 할것이다.     늘 밝은 세상에서 태양의 축복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단정하게 정좌하고 있는 여래불의 신상앞에 한눈 감고 한눈 뜨고 소원을 뇌까릴제 몸은 불조앞에 있으나 마음은 돈뭉치와 함께 굴러다닌다는것을 전지전능한 여래불이 알기나 하는지, 그리고 보다 많고 날로 더 많아지는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천리혜안 부처님은 굽어보고 계시는지, 예수도 수많은 신도들이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체 하며 자기 리속을 챙기려 꼼지락거리는것을 알고나 있는지…    공생공존하기 위해 맺게 되는 모든 인연들이 다행일수도 있고 불행일수도 있다. 어찌 생각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할수도 있다. 뭇사람들과의 인연이든 부부인연이든 재물과의 인연이든 직장인연이든 자연스러운 인연이 아니라면 꽈배긴가 타래떡처럼 배배 꼬이는 인생이 될것이고…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사회불평들을 의론하고 돌이킬수 없는 부패에 침을 튕기지만 어떤 사람은 행복감에 취해 그런 의론을 예전같으면 멸문지화를 당할 “사회불평”이라고 펄쩍 뛸것이고 어떤 사람은 막무가내함에 손을 휙 내젓고 속으로 참을 인자를 외우기도 할것이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낮과 밤이 엇바뀌듯 규칙적이 아니다.     가령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자. 즉 이 세상에 모든 생물은 모두 생존권이 있으며 생명가치가 있다. 례하면 걸어다니는 료리들인 돼지, 소, 닭, 헤염치는 물고기 등등, 인류의 사회공약에 무고하게 동류를 살해하는것을 금기하고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권리로 그런 생명체들을 잔인하게 잡아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뜯고 오리오리 칼로 저며내고 칼탕치고 삶고 고으고 지지고 볶고 상추에 싸서 먹는가?     이는 두말할것없이 우문중에 우문이다. 대답은 지극히 리기적인 인간이 류행어처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타생명을 마구 잡아먹는게 당연지사라는것이다. 우문에 현답이로되 기실 상식을 초월하는 원본사상이 깃들어있다. 즉 이 세상, 이 사회의 본질을 투시하고 파헤치는 그런 심각한 문제가 예시되는것이다. 일컬어 “사회강자”는 “고기”를 먹는 자들이며 사회약자는 강자에게 먹히우는 “고기”들이다.      세상구석을 벗어나 좀 멀리 내다본다면 금전만능주의 자본주의 사회체계는 압박도 착취도 없는 평등한 사회의 아름다운 리상도 말아먹고 결국 빈익빈 부익부 세상을 만들어냈고 결과 량극화 현상이 극에 달하게 되였다. 자유, 평등은 간곳이 없이 오로지 힘의 론리가 지배하는 불가사의한 인간세상,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였다. 극단적 리기주의자들이 세상을 쥐락펴락 하기에 평등은 허황한 념원속으로 숨어 들었고 불의를 보고 참아내지 못하는 정의지사들과 도리와 례의범절을 지향하는 군자들은 뒷전으로 쫓겨갔거나 매몰당하고있다.     “자유,평등,박애,민주,인권”이라는 기치아래 실리주의, 금전만능주의는 금수들의 적자생존의 론리만을 진리로 내세우고있다. 피의 비극이 끊임없이 빚어지는 지구촌을 보라, 무력패권주의가 휘둘러지는 천상천하, 마음에 들지 않은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구미에 따라 유린당하고 훼멸당하고 있지 않는가?그러나 개체들은 먹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앞가림에만 분주하다.     페일언하고, 세상을 거의 살다가 다행히 인터넷시대를 접하면서 안계가 조금 넓어져서 지구촌의 세상만사를 눈요기하게 되니 헛살고 있지는 않는것 같다. 내 눈에 보이는게 세상이 전경이 아니고 내가 보려는 세상은 다 볼수 없으나 세상구석이라도 보는것이 여간 의미롭지 않다. 그렇다고 눈앞에 보이는 세상에 감탄표만 칠수는 없고 의문표만 달수도 없다. 이는 두 극단이다. 마침표는 가당하지 않으니 아마도 풀이표 혹은 점선을 쳐두고 하회를 보아야 하리라                                                             2016년 1월 1일
878    문학언어에 대한 초보적 탐구 댓글:  조회:2705  추천:0  2018-05-30
                                     문학언어언어에 대한 초보적 탐구                                                              최 균 선       1. 들어가면서       언어가 휘황찬란한 인류문화사에서 최정예의 발명품이라면 문자는 인간을 세계에 중심으로 만든 최초의 계기가 되여 인간의 삶의 양태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는바 언어,문자가 있는 곳에만 문명세계가 있다. 모든 의미는 언어에서 나오며 언어가 없이는 어떤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가 수행하는 존재의 대응기능은 절 대적이다. 이 시점에서 인류문명세계는 곧 언어의 세계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언어의 대응기능은 만능이 못된다. 우리는 살면서 부분적이고 상징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늘 한계성을 감수하게 되는바 이러한 론리적거리를 문학언어라는  특수한 문맥과 수사학을 통하여 좁히려고 시도한게 문학이며 그런 장인정신을 발휘한 사람들이 작가들이였다. 작가들에 의하여 빛나게 실천된 언어의 자의성은 기본적으로 비유와 상징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창조적이고 개성적이며 다의적인 표현의 길을 열 어주었다. 이런 언어의 자의성과 소통성을 가장 예술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활 용하여 언어의 품격과 생명력을 고양시킨 결정체가 곧 문학언어이다.       2. 문학언어의 이모저모       2.1 문학언어의 특성     1) 문학언어의 기능성: 일상언어는 그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인데 리처즈 (영국 비평가) 는 진술이라고 명명하였다. 리처즈로 인해 문학은 어떤 인상에 의존 하는 아마츄어적인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 즉 “본질적인 가치에 의거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를 검토하는 중요한 학문이 되였 다. 그러나 문학언어 특히는 시언어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해당 대상의 절절한 진술 이 아니라 감동과 그에서 인기된 사상감정, 견해, 태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인 데 그것을 의사진술이다. 여기서 일상언어의 문학적가공이 필수 작업으로 되였다.    문학언어는 기능의 측면에서 일상어나 과학언어를 뛰여 넘는다. 문학언어가 수 사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의적이고 이중적인 의미창조에 로심초사한다. 일상어 와 과학언어는 단순명료한 의사소통에 목표를 두고 그 달성으로 사명이 끝나지만 문학언어는 문맥성과 변용성, 내포성과 비유성, 허구성과 창조성 등에서 고유한 속성을 구현한다.     2) 언어의 활용성: 문학언어는 작품의 문맥 속에서만 제 기능이 발휘된다. 작가가 일상어를 작품 속에 인입하는 순간 문학언어로서의 기능이 발휘된다. 일상어의 상식적인 의미는 문학적 문맥 속에 녹아들면서 개성있고 함축적인 의미로 변용되기 시작한다. 단어선택과 문장배렬을 포함한 모든 창작기법과 수사전략의 결과이다.     문학언어는 감동적인 전달을 목표로 선택하고 배렬하여 예술적인 의미의 창조에 도달한다. 무릇 어떤 쟝르에서든 즐겨 사용하는 것이 비유와 내포의 수사전략이다. 문학언어는 하나의 단어가 여러 가지의 대상을 지시할 수도 있고 여러 개의 단어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읽을 때 텍스트에 심취되기도 하지만 한편 문맥 속에 내포된 언어의 다의성, 예술화에 매료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를 창출해 내는 마력이 문학언어에 고유한다.     문학작품의 내포적의미는 한마디로 비유나 상징의 원리를 언어의 자의성과 련 결시켜 만들어내게 된다. 주어진 문맥 속에서 소통이 가능한 내포의 힘으로 인해 다양한 문학적 의미가 시공을 뛰여넘는 공감대를 확보하게 된다.     3) 문학언어의 허구성과 창조성: 문학작품은 미지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작가의 예술수단으로서의 허구의 산물이다. 허구성이 개연적인 세계를 꾸며내는 힘이라면, 창조성은 그 허구성을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동력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언어를 창조적 재현과 창조적 모방의 도구로 활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했을 때도 그것은 개연 성을 전제로 한 창조적 모방을 의미한다. 이 러한 창조성과 허구성은 작가에게 문학 언어를 일심불란 가공하여 새로운 인식과 표현의 세계를 열어갈 가능성을 확보한다.     문학언어는 일상용어를 승화시킨 언어 즉 가공을 거쳐 규범화된 서면어로서 민족 공통어의 고급형식이다. 문학언어는 시, 산문, 소설, 극본, 씨나리오 등 다종다양한 문학작품의 언어로서 인민구두창작 과정에서 가공되고 제련된 언어도 포함된다.       2.2 문학언어의 궁극적목표     일상언어의 문학적인 활용의 목표는 우선 대상에 진실하게 접근하는 것이며 버금으로 예술화, 형상화에 의한 대상에 대한 미적감동과 설득, 교화에 있다. 작가가 문학 작품속에 재현한 진실과 진리는 작가와 독자 공감하고 공유하는 체험의 새 세계이다. 문학언어의 상상력의 극대화는 작가가 예술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미적 의도를 완벽하게 구조화하는데 유일무이한 수단이다. 작가가 이러한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문학언어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한 작가의 능력은 이야기를 최적으로 감칠맛이 있고 감화력이 있도록 최적의 언어로 예술화하는 데서 과시된다. 창작과정에서 예술적 상상력의 힘은 문학언어로 구축된 텍스트를 통해서 구조화 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기의 감정과 사상이 독 자에게 최대한으로 전달되기를 갈망하지만 작가-텍스트-독자의 3자가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불일치 등으로 불만족은 문학언어의 구사여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그 의미가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이기보다는 립체적 내지 고차원적이라는 시점에서 언어의 내연적 의미와 외연적 의미를 가진다. 외연적 의 미란 밖으로 드러난 말의 일반적 의미를 말하고 내연적 의미란 어떤 특정한 문맥 속에서 독자가 외연적의미외에 파악하는 의미들을 말한다. 일상언어의 기본공능이 우주만물에 대한 해석, 인간들간에 정보소통이라면 문학언어는 자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감수와 인식으로 사람들의 감각방식을 개변시키며 그로써 심미효응을 실현한다.       문학은 언어의 사전적 의미와 언어규범에 만족하지 않고 새롭고 개성적인 의미의 창조를 위해 언어를 활용함으로써 정보전달이나 론리적 주장을 위한 언어활동과는 다른 특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상언어는 구체적인 의사전달에 충실하고 문학언어 는 정서적인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을 가진다. 이를테면 운문문학은 알심 들여 선택된 운률적인 언어로 느낌과 정서를 전달하며 산문문학은 운률적인 언어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사건, 생각, 느낌 등을 서술한다.     문학언어가 일종 창조성적 언어로 거듭나는 것은 문법결구와 론리요구를 돌파하여 개인의 감정색채와 풍격이 두드러지는바 일반적으로 묘사, 상징부호체계이다. 일상용어는 문학언어와 본질적인 구별이 없지만 량적으로는 구별된다 즉 문학언어는 언어라는 무진장한 금광에서 금돌을 캐내여 계통적으로 배렬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일상언어가 문학언어로 거듭날 때 실용적의의는 담박해지는데 그것이 곧 문학언어의 공능이고 매력이 된다.       이처럼 언어의 사용이 사전적 의미의 전달에 그칠 때를 이르는 것이 외연이고 문학작품에서처럼 사전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전달될 때, 그리하여 그것에 수반되는 정서적효과나 암시, 련상, 함축 등이 문제시 될 때를 내 포라 일컫는다. 이는 단어가 초론리적으로 사용된 결과이다.     “진달래”라는 꽃을 례로 들어 말해보자. 만약 진달래란 무슨 꽃인가? 라는 질문 에 생물학자는 진달래란 진달래과에 속하는 락엽관목인데 우리 말로 참꽃이라 불리며 한자어로는 두견화(杜鵑花)라 한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할것이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진달래는 봄의 선구자, 나아가서는 혁명의 선구자를 상징하기도 한다고 대답할것이다. 진달래라는 대상 즉 동일한 개념을 놓고 서로 다른 표현을 한 이 개념정의는 내포와 외연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지만 여기서 창조성적인 언어구사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전자는 진달래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집합을 개괄적(외연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후자는 진달래라는 개념이 가진 속성과 특질(내포)이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감수, 정감을 표출한 것이다. 이처럼 모든 낱말은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를 가지 고 있는데 외연은 론리적이고 과학적이여서 개념규정에 제한성 있다면 내포는 감성 적이고 주관적이여서 개념규정의 가능성이 무제한적이다.     이처럼 내포는 속성과 특질로 정의하기 때문에 부동한 사람이나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고 상징적이거나 함축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작가나 시인은 련관된 련상이나 그 개념이 가진 속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정서적감화가 가능 하게 된다.  이것을 시인, 작가의 문학적 재질의 발휘라 할 수 있다.       2.3. 문학언어의 매력     언어는 문학을 실현시키는 캐리어이지만 흔히 “형언할길 없다”는 말처럼 창조성적인 문학활동에서 늘 언어의 빈곤을 느끼기도 한다. 언어의 이런 제약성을 극복 하기 위하여 작가들은 한 개념(단어)의 내포의 발굴과 확장에 로심초사하는바  특히 시인들은 시어의 함축성을 기하여 사금을 일어내듯 심혈을 쏟아붓는다.     문학언어의 경우, 내포는 그와 련관된 가능한 모든 것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상공간이 확장된다. 그런데 외연은 내포를 규정하지 못하지만 내포는 외연을 규정한다. 또 다른 례를 들어 “장미는 사랑과 희망의 꽃이다”라는 내포적 표현은 “장미는 장미과 장미속에 속한 관목성의 꽃나무다”라는 외연적 서술과 배치되거나 즉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장미에 대한 외연적 표현은 “장미는 사랑과 희망의 꽃이다”와 관련이 없다. 더 부연한다면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포가 문학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 하나로 간주되는 리유는 비유, 상징 등이 모두 말의 함축적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다양한 반응을 문맥상의 암시에 의해 유발하도록 쓰인 말은 모두 함축적이라 할 수 있다. 내연적의미는 다음 세가지 로 구분되는데 첫째로 개인적 체험의 결과로 부가된 의미이고 둘째는 집단적의미, 민족적, 문화적 또는 특정 사회적 경험이나 전통에 의해 첨가된 의미이며 세번째는 인류의 보편적 체험에 관계된 의미로서 이것은 가장 함축적인 의미이다.     문학언어 구사에서 류개념과 종개념을 잘 가려쓰는 것은 문학언어의 내연을 확장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고전적명작가극《피파다》에 나오는 가사를 례로 들어 설명해 보자. “봄이 왔다. 뻐꾹새 노래 부르고/숲속에 진달래 피였네 붉게 피였네/ 모진 세월에도 봄철은 찾아와/산허리 돌밭 우에 밀보리 푸르렀네/백두산 두메에도 산나물 피여나고/실버들 가지가지 버들꽃 피여나네”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뻐꾹새, 진달래, 밀보리, 산나물, 실버들, 버들꽃들과 같 은 구체적 대상을 나타내는 단어를 통하여 이른봄의 아름다운 정경을 눈앞에 보는듯 이 그려냈다. 만약 여기서 뻐꾹새 대신 새, 진달래 대신 꽃, 밀보리 대신곡식, 산나물 대신 나물, 실버들 대신 나무라는 류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썼더라면 봄은 봄이지만 이른봄인지 늦은봄인지 알 수 없을 뿐만아니라 봄의 정경을 이처럼 생동 하게 그래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가사에서는 작자가 알심들여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례컨대 작자는 이른봄의 정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게 위해 새들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봄을 알리 는 뻐꾹새, 꽃가운데서도 맨 먼저 피는 진달래, 곡식가운데서도 맨 먼저 푸르러지는 밀보리, 나무가운데서도 물기가 제일 빨리 오르는 실버들을 골라썼다. 례에서 보다싶 이 종개념에 속하는 단어들은 류개념을 특징짓는 단어들보다 구체적인 사물현상을 나 타내는만큼 서술의 생동성을 보장함으로써 대상을 구체화하는 표현효과가 크다.     문학언어가 시사한 세계는 허구적인 상상의 세계이다. 그만큼 문학언어의 구성요 소에는 음향요소, 의미요소, 이미지와 은유요소, 상징요소, 정신요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을 가지고 전대미문의 시적경지를 창출하는 시인이라도 무중생 유로 완전히 새로운 언어체계를 창조해낼 수 없다. 누구든 전통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일상언어에서 발굴, 제련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기본규칙을 따라야 한다.          2.4. 문학언어의 구사문제    각종 문학쟝르는 자체의 언어구조를 고유한다. 희곡은 언어의 회화공능에 착중하 고 소설은 언어의 서술공능에 착중하며 시는 언어의 서정성공능에 착중한다. 그러나 그 무엇에 착중하든간에 언어의 각개 공능은 문학의 존재와 발전에 기본조건으로 된다. 그리하여 우수한 문학작품은 민족문화의 보물고가 되고 왕왕 민족문화의 중요한 상징으로 되여 그 민족들의 관념속에 숭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세대대로 전 해지는 대물림보배가 되여진다.     시어는 무조건적으로 정서에 푹 절구어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상용어를 바탕으로 동일한 선상에서 선택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말의 뜻은 일단 관련대상을 정확 하게 지시하는 면을 지니지 않을수 없다. 이것을 언어의 외연 또는 개념지시성이라 말한다. 여기에서 외연이나 개념지시란 이미 우리 주변에서 많이 씌여진 과정에 대중 에 잘 알려져 있는 뜻을 가리킨다. 시인이 아무리 기발하게 언어를 선택하고 조합했 다 해도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을 쓸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단어의 외연을 “사전적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파시에서는 시의 언어가 정서적 용법이 되여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경향도 있는데 사전적 의미와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시의 언어가 쓰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시의 언어는 외연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상적 언어이상의 것이기는 하지만 일상적 언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거니와 세상에 그런 시인이 태여난적이 없다,     한 낱말이 어떤 단일한 의미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쓰인 문맥상으로 보아 동시에 다른 여러 뜻을 암시하거나 내포할 때 즉 함축할 때 이를 내포라 한다. 외연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설명이나 론술(례를 들면 과학 또는 철학론문에서) 에 쓰 이고 내연적 의미는 독자의 지적리해 이외에 감각적 내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글, 즉 문학작품, 웅변 등에 주로 쓰인다.     시의 언어는 외연에만 만족할 수 없는 말들이다. 거기에 요구되는 정서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크고, 짙게 하기 위해서 시의 언어는 내포 또는 함축적의미도 리용하 고자 한다. 이것은 물론 지시적 기능을 넘어선 차원에서 쓰여진 언어다. 그리하여 이 류형에 속하는 의미는 사전에 적혀 있지 않다. 그보다 이런 말의 뜻은 문맥을 통해서 빚어지며 제나름의 맛이나 멋을 지닌다.     한수의 절묘한 경물시에서 인격화된 언어의 공시적공간위에 펼쳐지는 현실적 예술경지는 인성으로 확장되고 보듬어진 존재론적 언어의 창조품이다. 그처럼 유난 하게 의사소통을 잘 시키는 일상의 언어로는 인간의 삶의 현장을 총체화하지 못한다. 문학언어만이 인생의 한계의 지평을 넘어선 지점에서 인간과 생의 사태들을 그때까 지는 미개척지로 남은 독자들의 모종 정감세계에 재현시킨다. 그것이 비록 허구가 될지라도 독자들의 상상의 한계밖으로 이끌어낸다. 그것이 문학언어의 효능이다.     례컨대 시인은 시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률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면서도 공명이 가 능한 아름다움이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공간을 류추해내는 시인의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결과적으로 언어의 힘을 입는다.     상실의 아픔을 눈물로 대변하고 얻음의 기쁨을 웃음으로 반사할줄 밖에 몰랐던 원시인들로부터 차차 개화하여 문명의 새아침을 열어갈 때 문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정화의 기쁨을 아름차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내가 모르고 있던 삶의 다른 현장,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가시적인 현실로 체험할 수 있게 한 것이 문학예술이다. 모든 종교가 사유가 리성을 이끌어서 희망사항에 속하는 정신세계를 구조화하였다면 문학 은 점감과 정서가 문학언어의 마력에 힘입어 예술적 정신가원을 가꾸게 하였다.    문학은 작가가 가장 비슷한 대상물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면서 한편 독자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재현한다. 이 시점에서 문학을 무한한 가능성과 독창성의 세계라고 하는바 좋은 제재를 형상화하고 잘 부각된 인물형상을 창조해 주는것 바로 문학언어이다. 문학을 작가의 자아실현의 실체라고 할 때 작품의 성패는  바로 어떻게 언어를 다루는가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다.     우주공간은 물론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이 부지기수이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리유를 가지고 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일컬어 세상만물이 조물주의 피조물이라면 문학은 작가가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문학의 특성은 새로움과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그것은 형태적아름다움보다는 언어적아름다움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나가면서       언어예술인 문학은 언어를 조합해 조직화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러나 순수문학을 위한 언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이들 일상용어가 그대로 문학의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언어를 정교하게 다듬고 독자적인 생명을 불어넣어 새롭게 조직할 때 비로소 문학언어로 부상된다. 부러진 나무밑둥의 상흔은 흔히 있을수 있는 사실이다. 이런 소재로 그림을 그려 생동하고 정확하게 시사할 수 있지만, 미적으로 승화시킬 수는 없다. 그리하여 문학언어만이 생명현상의 화면을 예 술적으로 드러낼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라 하는 것이다.     작가는 문학언어로 하여금 사물을 표시하는 범주를 넘어 현실에 부재하는 인간의 희망사항들을 재현하여 없는 것을 있게도 하고 있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마술사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작가를 언어의 련금술자, 언어의 마술사라고 칭한다. 한부의 빈약한 문학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곧 문학언어의 빈약에서 비롯된것이다. 발생한 사실자체를 실감나게 전달하는 것은 재능있는 이야기군이라도 가히 해낼 수 있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수하게 전달하는것은 문학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예술화된 문학작품으로 거듭나려면 문학언어의 마력을 빌려야 한다.     력사는 특수한 사실의 기록이지만 단 한번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력사기록은 특수한 사실을, 그대로 제시한 것이지만 문학은 특수한 사실을 통해서 개연 적 진실에 도달한다. 그 장거를 문학언어가 완성시킨다. 그것이 문학을 예술이게 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는 근간이다. 흔히 문학공부를 하려면 언어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작가수업에서 첫수업이 언어공부라고 하는 데 민족작가라면 자기 민족언어에 대한 공부를 착실하게 하는 것이 작가수업에서 선행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언어는 자고로 민족의 얼을 담은 그릇으로서의 말과 그 말을 담은 그릇으로서의 민족문학언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17년 7월 23일            2018년 제 3호에 발표됨
877    (진언수상록78) 운명을 짓씹어본다 댓글:  조회:2461  추천:0  2018-05-20
                                               운명을 짓씹어본다                                                         진 언       사람들은 흔히 바라던 일이 꼬이여 마뜩치 않으면 운수가 없다 한탄하고 돌이킬수 없는 불행과 고통에 맞다들면 명이 사납다고 개탄한다. 운명이란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초인간적힘으로서 그것은 불가피한 필연의 힘, 예측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힘이기에 통탄하게 되는것이다.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비합리적,초론리적인 힘으로 작용하기에 더구나 막무가내함에 주저앉게 되고 미리 주어진 생명운동의 궤적우에서 가슴을 두드린다.     이처럼 우리의 운명의식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눈앞에 벌어졌을 때, 인생을 다 살고나서 불만족의 눈길로 돌이켜볼 때, 여의치 못한 많은 일들을 총괄적으로 해석 할 때 더욱 새겨지는 법이다. 운명과 같은 의미로서 숙명, 천명 등을 쓰는데 운명관의 제1형식은 숙명론이다. 이것은 운명의 힘을 필연적인것으로 보고 인간의 존재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는 소박한 신앙으로 정립된것으로서 종교적색채가 짙다.     운명은 운과 명을 포함하고 있는데 간단한 의미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인생의 장하 (长河)에 실린 객관적조건이고 조우이며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개인력사의 변수다. 명은 선택할수 없고 운은 배워서 되는것이 아니요 얻자해서 얻어지는것도 아니다. 운명은 아는것과 모르는것 사이에 한갈래 다리로 련계되여 있지만 다 알수 없거니와 파악할수도 없기에 지자나 우자나 운명의 적수가 못된다.         인생과 운명은 점철되여 있지만 꼭 같은것은 아니다. 인생을 먼먼 려행길이라 한다면 운명은 그 길에서 발생할수 있는 어떤 사건일수 있다. 인생길에 어느 때 무슨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불상사가 발생한 후에야 개탄하기 일쑤이다.《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면,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했는데…》라고 후회하지만 운명은 이미 발생하였고 하나의 미지의 틀로 그려져있었다. 인생에 운명이 포함 되지만 인생은 운명에 매이기도 한다. 그래서 운명을 개변할수 없지만 보충할수는 있다고 한다. 이것이 인생과 운명의 구별점이라 할지 모르겠다.     티끌세상에서 다사분주하게 뒹굴다가 인생이 저물때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였지만 생각할수록 모순에 빠지고 알똥말똥하다. 운명은 공정한가 불공평한가? 하늘은 창창하고 세월의 강물은 도도한데 왜 나의 운명은 얄궂기만하냐? 나서부터 잘 사는자, 못사는자, 강자, 약자, 똑똑한자, 우직한자,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순한 사람, 음흉한 사람, 웃음을 흘리며 다니는자, 우수에 잠긴자…인생마당은 천층만층이요 인간은 류류별별이라 운명은 분명 공평하지 못할수밖에 없으렸다.     나서 곧 재부의 소유자가 되는자는 운명의 불공평을 잘 모를것이요 숙명인양 빈궁속에서 일생을 허덕인자는 운명을 저주할것이요 끝까지 운명의 조롱을 받은자는 반역정신으로 심신이 찌들어버릴것이다. 세상엔 절대적이란게 없다. 운명의 공평과 불공평은 상대적이고 서로 얽혀있다. 복속에 화가 있고 화속에 복이 있다는 말이나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는 말로 자기를 위안하지만 결국은 허황하다.      운명은 한가지 면에서는 공평하다. 영웅호걸도 좋고 초민백성도 좋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좋고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해도 좋고 마감에는 흙으로 돌아가고 백골이 진토되여 한오리 먼지로 날려가 버리는 일이다. 일희일비의 인생이라 단지 살아서 숨쉬며 이 땅을 밟으며 걸어다닌다는 그 한가지만으로 인생의 희열을 만끽해야 하나?     사실 자기 삶의 취향과 세상사가 돌아가는 꼴이 모순될 때 슬프지 않을수 없다. 만사여의란 말이 있지만 속타는 일이 한가지도 없다는것도 불행, 비극이 아닐수 없다. 고통을 맛보지 못한 삶은 진정한 행복의 진미를 모를것이고 처절한 비애를 느껴보지 못한자는 크낙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철학가 쇼펜하우엘도 인생은 슬프고 숙명적이라고 했던가,     행복에 주어진 표준이 없듯이 운명에 대한 평가는 일치할수 없다. 석가모니 교리에는 전생에 무엇을 심었으면 이승에서 무슨 열매를 얻고 금생(今生)에 무엇을 심으면 후세에 무슨 열매를 얻는다고 설교한다. 복잡하게 말할것이 없이 덕은 닦은데로 가고 죄는 지은데로 간다는 인과보응의 순환을 말하는것으로서 운명의 지배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역시 막연한 설교이다.     운명을 개변할수 있는가? 여러가지 좋은 조언들도 많더라만 살생하는 악한 일도 삼가했고 어려운 자를 도와 적덕도 해보느라 했으며 어린애를 사랑하고 로인을 존중했으며 인욕(忍辱)을 배우고 관용도 베푸느라 애썼으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사람을 대하고 손해를 볼지언정 분복에 없는것을 차지하려고 다투지 않았으며 마음을 맑게 하고 따스한 가슴으로 세상을 마주하는라 애썼지만 내사 운명에 무엇이 개변되기나 했는지 인생을 거의 살고나서도 알수 없다.     누가 운명앞에서 자유로울수 있단말인가? 생각하는 갈대밖에 안되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운명을 피해갈수 없어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건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에 서 탈출할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인생이 너무나도 기구하다고 개탄하게 될 때, 매사 뜻하는대로 되지 않고 비탈리기만 할 때, 인생은 고해라 고생이 장고생이라고 절감할 때, 운명이란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 안되는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데 잘 되는놈 앞엔 호박이 넝쿨채 떨어진다고 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넘어져도 팥죽함지에 코를 박는다고 하는가?       인생은 촉박하고 운명의 장난은 짓꿎다. 그러나 어떻게 주어졌는지 미리 알수도 없는 운명대로 세상을 살기는 너무나 억울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여난것은 운명이지만 가난하게 사는것은 운명이 아닌것이다. 황차 좋은 운명을 가지고 태여났다고 하여서 평생 행복한 삶을 사는것도 아니며 나쁜 운명을 갖고 태여났다고 하여서 줄창 불행한 인생을 사는것이 아니라고 믿고 살아야 그나마 어려운 인생을 지탱할것이다.     인생관은 교육으로 수립될지 모르나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요, 인생과 운명에 도전해야 한다고들 가볍게 말하지 말라. 주어진 자기 운명이 어느때, 어떻게 불만족스러울지 어찌 알고 도전한단 말인가? 자기 인생극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대단원을 이룰지 어찌 알고 마음 가지기에 달렸다고 한단말인가? 그런 말들은 기성된 구절을 나름대로 옮겨놓은데 불과한것이다.     혹자는 운명의 동의어는 성격이라 하고 운명은 환경과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환경이란 한 개인이 조우할수 있는 가능성의 범주이고 성격이란 그 조우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성격이 운을 결정할수도 있고 운이 성격을 결정할수도 있다면 성격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 운명이 외재적력량이라 할 때 사람이 운명을 지배한다는것은 잠꼬대이다. 다만 운명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지배할수 있을뿐이겠지,     차라리 역경에 도전한다거나 불만족스러운 처지에 도전한다면 사개가 좀 맞을듯싶다. 인생이 장하일 때 자신을 하나의 물고기라면 흐르는 강물에 육신을 맡겨두고 순순히 떠내려가는것이 운명이다. 바람따라 구름이 가듯이 살면 운명에 순응하는것 이다. 그런데 강물을 따라 흐르는것은 무생명체와 죽은것과 혹은 기진맥진하여 삶을 포기한것들이다. 생생 살아서 헤염치는 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를 좋아한다. 살아있음이 물을 거슬러 오르는데서 체현되고있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장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로는 될수는 있다.                                                           2012년 1월 15일                                                   
876    (진언수상록 77)《계획》의 비애 댓글:  조회:2579  추천:0  2018-05-15
                                            《계획》의 비애                                                           진 언       일년지계는 재어춘(一年之计在於春)이요 일일지계는 아침에 달렸으니 전망성과 계획성이 없이 어떠한 사업이든 성과를 운운할수 없다. 만사는 2분법으로 나누어 보아야 하고 환득환실의 각도에서 문제를 투시해야 한다면“계획”이란것이 워낙은 인류의 진화와 물질재부창조에 더없이 유익한것이다.     그래서 계획경제시대도 그 나름의 우점이 있다고 긍정해야 할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어온다면 계획경제는 전시체제에 최적이였다는것이다. 소유의 거민이 표제로 공급받지 않았다면 간상배, 투기모리분자들이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는것이였다. 지금 같이 투기모리가 창궐한 상황에 비하면 확실히 우점이였다고 수긍하게 된다.     두번째로 계획경제는 가난하고 말끔하던 나라를 현대국가로 이끈 작용을 하였다고 한다. 과정이 없는 결과가 있을수 없다는 시점에서는 맞는 론단이다. 다음 지금 같은 시장경제는 귀환(反馈)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시장기제는 자원배치문제를 해결 하였고 공유경제의 효률을 제고시켰다는 등등, 아무튼 계획경제시대는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영광스럽게 완성하였고 휘황한 성취를 거두었다고 할수 있다.     개괄해 말하면 계획경제시대에 대하여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해야 할것은 당연하다. 무조건 먹칠할수도 없고 한마디로 부정할수도 없다.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둘이 하나로 합해지는 철학원리나 혹은 성공적인 수술이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데 졸문은 경제문제의 시대적추이같은 거창한 문제를 다루려는 취지가 아니라 외곡되고 오도된 계획에 대한 관념에서 진행된 일부 시행착오에 대해 말하려는것이다.     사실상 계획이 한때 많은 방면에서 오도되였다. 계획경제시대 농민들은 일년내내 등이 휘도록 농사지어도 그냥 식량난에 허덕이다보니 계획소비방법들이 많이도 고안되였더랬다. 황당한 시대에는 괴상한 창조자들이 많이 나오는법이다. 어떤 사람이 시래기로 쌈을 싸먹으면 배가 인차 부르고 오래 꺼지지 않는다고 했고 밥이든 죽이든 젓가락으로 먹으면 후르륵!소리와 함께 공기까지 들어가서 인차 배부르게 된단다.     그리고 앉아서 먹으면 배가 처지면서 많이 먹게 되므로 서서 먹는게 좋다고 하는 등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거국적인 절약방법들을 많이도 창조발명했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은 천방야담을 듣는것처럼 허구프게 웃을것이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때먹기를 비롯해서 천방백계로 굼때우려 하였고 집집에 량식절약공약 따위를 붙여놓고 아무리 귀한 손님이래도 축객령을 내렸다.     그때 계획성이란 곧 먹고 입고 쓰는 모든것의 제한 그 자체였다. 가난이 영광이고 잘먹고 잘사는것이 “자산계급의 생활방식”으로서 수치라는 황당시대 시행착오는 국민을 오도하면서 가난한《사회주의》에 모든것을 기탁하게 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계획성을 절제와만 련계시키는 사유모식에 굳어져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야말로 계획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례컨대 지난세기 70년대말부터 실시된 계획생육을 보자. 기하급수적으로 증장하는 인구대국으로 놓고 볼 때 총체적으로 생 육을 제한하는것이 기본국책이긴 하지만 우리 조선족으로 말하면 그저 줄이고 못낳게 하는것이 곧 계획생육이 아니였음을 지금와서 가슴치며 통탄하게 된다.     그 어느 소수민족보다 이른바 계획생육에 급선봉이 되여 90년도에 가장 낮은 출생률을 공제하여 현대인구재생산률에 진입했다고 홍보하였는데 행정상에서는 임무 완성하고 정치상에서 실적을 쌓은것이 되였는지는 몰라도 력사적시행착오를 범했다는것을 자인해야 할것이다. 조선족은 인구증장에서 계속 하강선을 긋고있어 이제 50년 후에는 19만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예측이 나오고있다. 이는 민족의 존재여부와 관계되는 이른바의 계획의 비운이 아닐수 없다.     인구의 자질제고도 인구의 결구, 량질화도, 인구의 지역경제도, 사회자원환경의 조화적발전도 일정한 량의 보장이 없으면 다 공리공담이 된다는것은 상식이다. 계획성이란 의식적으로 유지되는 부단한 균형을 의미한다. 첫시작부터 무조건 줄이고 제한하는데만 열심하다보니 인구의 자연생장률과 자연사망률의 비례를 고려하지 않았고 미시적각도에서 발생할수 있는 돌발적인 인구류실을 예상하지 못한 근시안적인《계획》이야말로 얼마나 유치한 작법이였던가?      지금와서 아이를 둘을 낳으면 우대를 한다고 하는데 력사적시점에서 잘못된것을 변상적으로 반성하는 때늦은 미봉책이다. 배는 이미 떠나서 산굽이를 돌아갔다. 다시 불러올수 있는가? 물론 조선족인구가 거의 마이나스성장을 기록하게 된 원인이 단지 계획생육에만 국한된것은 아니지만 첫시작부터 인구증장의 경영에서 곁길로 빠져버 렸던것이다. 물이 새기시작한 배는 갈아앉게 생겨먹었다. 거기에 등을 디밀고 안깐힘 쓰는것은 대책이 아니라 무모한 욕망일뿐이다.     우리 민족의 인구감소의 현황에서 비애를 느끼지 않을수 있는가? 지금 5십대 후반의 사람들로 말하면《재수없는 세대》라 할수 있다. 한창 잔뼈가 크고 굳어갈 때 이른바《3년재해시기》였고 한창 지식을 배워야 할 때《문화대혁명》을 맞이하여 열화속의 소년시절을 보냈고 학교를 대충 나와서 일자리를 얻고 인생을 시작하려니까 일컬어《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바람에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에 내려갔다.     지각한 사랑이지만 인륜지락을 마음껏 누리려고 하니 그만 하나만 낳으면 영광이고 둘을 낳으면 수치라고 호소하는 바람에 하나만 낳고말았다. 자식을 거의 키우고 일하며 사는 영광을 만끽하려는 때 공장, 기업들에서 기구를 간소화한다는 시책에 따라 일터를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사람은 자리에서 내려 (下岗)와야 했다. 하여 력사교과서에서만 기억했던 실업자가 된것이다, 다만 사회주의시대에 첫실업자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된것이 다를뿐 그 실속은 한가지다.     한 사람의 퇴직은 늙었다는것을 의미하고 늙었다는것은 빈까치둥지를 지키는것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만 낳았기에 두 젊은이가 네늙은이를 부양하게 되였다. 다행이 자식이 신변에서 사업하면 그래도 효성을 받을수 있지만 모두 외지에 가있다면 네 늙은이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되여 꿩구워먹은 자리를 퀭하니 바라봐야 할 신세로 된다. 이것은 한시대가 낳은 후유증이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돈이 많은가 적은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늙은 다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혹시 병상에 눕게 되면 호리할 사람도 없고 위문오는 사람도 없이 창밖만 처연히 바라보게 될뿐이다. 이런 처경은 거의 모든 늙은이들이 부딪친 공동한 문제일것이다. 역시 주도한《계획》이 맺어준 쓰디쓴 열매인것이다.     노상 지각하는 경험선생이 펼쳐드는 교훈서는 예이제 후회, 사후청심환같은 대책으로 엮여져있다. 먹을것도 입을것도 땔것도 계획경제의 속박에서 계량되여야 했던 그시절에 신물이 나지만 계획일반을 부정하는것이 아니다. 치국책에서든 개인의 의식주행에서든 무계획은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비판적어경에서“망탕지휘”라든가 “학비를 냈던셈”,“눈감고 발더듬이로 강을 건너기”같은 개념이 류행되고있는데 파헤치고 보면 결국 무계획성이 낳은 대작들인것이다.     공급과잉현상도 그렇다. 즉흥적인 산업발전에 의하여 지하자원개발도 무계획적이여서 자원고갈을 예기하고있다. 이 시점에서 계획은 영원히 필요하고 잘 세워야 하는 생존구도이기도 하다. 무계획생산은 망탕생산이다. 계획경제시대로 돌아갈수는 없지만 계획성은 만사에 우선하는것이여야 하리라.                                      2006 년 4 월 15 일
875    (칼럼) “갑질”을 비웃는다 댓글:  조회:2743  추천:0  2018-05-01
                                                        “갑질”을 비웃는다                                                                      진  언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갑질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였는데 ‘갑을’은 원래 계약체결의 당사자인 갑방(甲方)과 을방 (乙方)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계약은 정의상 둘 이상의 독립적인 개인이 자유의사에 의해 대등한 자격으로 체결하는 합의임에도 불구하고 갑이 거래관계에서 차지하는 우월한 지위를 리용하여 을에게 공정치 못한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바로 사악한 갑질이다.     갑부들의 잘난 “갑질”이 무척 성행되고있다. 려객기를 되돌리게 한 오너 임원, 백화점 주차요원의 무릎을 꿇게 한 고객모녀, 제자를 고문하고 인분을 먹인 교수, 운전수를 노예처럼 부려먹은 기업주, 기업회장의 항공사직원에 대한 폭행, 병사더러 술상을 차리게 하고 쩍하면 구타한 모사단장, 일컬어 인류 생명의 기사들의 일터인 병원내에서 만연된 임금갑질, 휴가갑질, 노동갑질, 모성갑질, 성희롱갑질, 폭력갑질, 지시갑질, 비품갑질, 정치갑질, 의료갑질…     갑질하는 자들의 잠재의식에는 잘난 우월감이 준동하고있다. 그런 자애가 자신을 선량한 갑으로 놓아두지 않는것이다. 갑질하는 자들은 안하무인이여서 타인의 삶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악랄하고 비루한 작태가 일상이다. 묻거니와 자기만이 주인이 아니라 타인도 자기 삶의 주인일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법인가, 갑질쟁이들은 인성공부에는 “묵은돼지”들이다.     힘있는 자들의 무제한적 권리가 힘없는 자들의 무제한적 의무로 규정되고 있는 비리한 현실은 인간의 저렬한 근성의 또 다른 화랑이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아프고 분통이 터지고 증오심이 비등할것이다. 힘있는 자들의 갑질은 막무가내라 할세 약자로서 또 다른 약자를 갑질하려 든다면 어처구니 없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한국의《연합뉴스》에서 청주 흥덕경찰서는 70대 택시운전기사의 뺨을 수차례 때린 혐의로 중학생 A(15)양과 B(15)양을 불구속 입건했다. 눈물이 헤픈만큼 동정심도 많고 순결무구해야 할 소녀들마저 갑질의 쾌감을 느끼려하니 말세는 말세로다.     더욱 경악할 일도 있다. 2년전인가, 경기도 이천시의 한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파괴된 인성의 패륜현장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39세의 기간제 교사에게 16세 전후가 된 학생 3.4명이 듣기조차 힘든 욕질과 침뱉고 매질을 하는 장면이 세상에 전파되였는데 만화나 소설도 표현하기 힘든 패륜 그 자체였다     학생들의 인성에 내제된 인간의 도리는 아예 찾아 볼수조차 없다. 정식교사가 아닌 기간제교사란 약점을 잡아쥐고 저지른 그 악랄한 '갑'의 근성이 어른들 사회를 조소하듯 표출된 더러운 모습이다. 사회 곳곳에 고질적으로 만연해 있는 "갑질문화"가 가장 신성하다는 교정에서 공공연하게 감행되였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한 나라의 인성질서가 가장 근본이 되고 확실하게 확립되야 할 교단이 저런 식으로 무너지면 한국사회는 미래가 없다.      타인에 대한 갑질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할수가 없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집착하다보니 타인의 삶에 치명적인 아픔을 주고있다. 갑질은 다른 사람을 주체로 보지 않는데서 생기는 지극히 가증스러운 병적인 심태이다. 갑질행위의 밑바닥을 파헤쳐 보면 저질의 인성의 표현이다. 그래 아니란 말인가? 자신의 행위가 결코 인간적인 작태가 아니란것을 알면서도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 들은 자신의 인격력량과 차지한 자리의 힘을 혼동하고있다. 제복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나뽈레옹의 말처럼 그 사람이 대단한것이 아니라 그 자리로 하여 으시댈수 있을뿐이다.     전통적 관념상 태여날 때 인격은 일률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각자 사회인이 되고 사회상에서 신분, 직위가 천차만별로 구별되면서 마치 “갑”과 “을”의 관계처럼 상위에 있는 인간간이 하위에 있는 인간을 박대하고 있다. 갑질행위를 너무 흔해빠진 분석을 들이댄다다면 입에 달고 있는 인권침해이다. 당신에게만 인권이 있는가? 피갑질자에게도 인권이 있다!     그럼에도 무지막지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근본을 잊고 갑질하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정상인의 심태일수 없다. 모든것이 변하는 이 인생마당에서 누구도 결코 갑으로만  살아갈수는 없지 않은가? 절대의 갑으로만 존재하는 생명체는 없으므로 좋으나 궂으나 상호의존해 살아가게 되여있다는 구구히 설명해주어야 알것인가? 도고한 갑질쟁이들이여, 그 좋아하는 갑질을 하기전에 한번쯤은 자문해 보라. 자신을 사랑하는만큼 랭철하게 해부해 본적이 있는가?     그러니 진정 강자라면 약자들앞에서만 거센치 하지 말고 가장 이기기 어려운 적수인 자신한테 수시로 갑질하라. 타인을 용서할줄 알아야 사랑할줄도 안다. 타인에 대한 관용은 자기 내심세계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다. 적덕이란 용서하는 마음에서 쌓여진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인간은 약자를 학대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할 때 되돌아와 자기에 대한 관용이 되기도 한다. 이는 지력상수가 높은 사람이라야 깨도할수 있는 인생도리가 아니다. 박애는 일종의 정조이자 수양이다. 박애를 지닌 사람만이 진정으로 스스로를 대접하고 남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기때문에 그의 삶도 즐거움으로 충만할수 있다. 이것은 인생상식이다.     사람이 지켜야 할 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문화적으로 허용되는 행동을 말하는 사회륜리법, 법적으로 허용되는 민법과 형사법, 그리고 인과보응이라고 하는 보편법이 그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법은 위반해도 무사할수 있으나 세번째 법을 위반하면 결코 무사할수 없다. 도덕법정도 법정이요 평생을 두고 징벌하기때문이다.     각설하고, 제대로 먹혀진 민주주의국가는 부하고 귀함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공생공존 하도록 잘 짜여진 시스템을 갖춘 국가이다. 고위관료는 고위관료대로, 기업인은 기업인대로 갑질을 당연한 행실로 여기고 어떻게든 ‘갑’의 위치에 서보려는 ‘을’의 그릇된 생각이 오늘날 ‘갑질’이 일종의 문화풍경으로 그려지게 된 원인이다. 갑질이 화해사회에서 생기지 말아야 할 악성병폐이지만 변화가 있을수 없다.     돈이면 만사통인 자본주의사회에서 특권층이 특권을 내려놓고 평등사회가 뿌리를 내리는 사회를 바라는것은 허황하기만 하다.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린 놀부는 죽었다 깨여나도 흥부가 될수 없다. 권귀들은 권귀들대로, 재벌은 재벌대로 호령질에 인이 박혀있기때문이다. 인격을 인격으로 보지 않으려는 지배구조에서 싹튼 ‘갑질’은 이제 인정마저 싹 말려버릴것이다.     닭들은 모이를 주는 주인의 손을 이라고 생각한다. 그 손이 자신의 목을 비틀기전까지만, 이것을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의 비유 혹은 귀납의 오류라고 말한다. 닭을 키우던 농부가 결국에는 닭의 목을 비튼다는것은 그저 아이러니만이 아니다. 이래저래 참으로 우스운 인간극장이요 웃기는 갑질문화라 하겠다.                                           2017년 11월 18일
874    (시) 어느 합수목에서 댓글:  조회:2767  추천:0  2018-04-27
                             어느 합수목에서                                       최 균 선                              보아라 어디든 합수목서                            찬찬히 보아라 갈래갈래                            실개천 흘러서 편도없이                            강물에 섞이는 즐거움을                              줄기찬 류수가 만날때에                            잠시는 격랑도 일렁이고                            용용용 고패도 치겠지만                            마침내 하나로 되노매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도                            유연한 물처럼 된다면야                            알륵도 배척도 가셔내고                            융합의 대단원 못이룰가                              철천지 원쑤가 아닌바에                            마음이 하나로 얽히려면                            사심이 풀어진 물이되라                            개체든 국가든 민족이든                              부딪는 쇠돌을 못보았냐                            깨지고 불타는 옥석구분                            대동강 한강이 흘러들어                            동해의 창파를 이루나니                              반만년 이어진 핏줄인데                            분렬후 으르렁 호시탐탐                            입발린 말하기 쉽다한들                            속다른 통일론 짓씹지마                                       2015년 8월 15일
873    (신작시) 평화의 봄꽃이여, 활짝 피여나라 댓글:  조회:2576  추천:0  2018-04-27
                               평화의 봄꽃이여 활짝 피여나라                                                     최 균 선                                세계의 의로운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무겁게 드리웠던 전운이 걷히고                              평화의 새봄이 성큼 다가선                              3천리 조선반도를 찾으라.                                민족분단의 아픔을 피눈물로 삼키며                              세기를 넘겨온 8천만 겨레들이여                              그대들의 뜨거운 마음이 달려오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력사적 비극의 검은 막이 찢기고있다                                       보라! 하나로 뭉치려는 두 지성이                             뜨겁게 손잡고 부여안고 웃으며                             한서린 분계선을 넘어갔다가                             다시 넘어오는 저 모습이                             70년 묵은 해원의 첫걸음이 아닌가!                               녕변에 약산 진달래꽃이 웃는다                             남녘의 무궁화꽃 향기를 풍긴다                             백두산 천지의 푸른물 격랑을 솟구고                             한강이 노래하고 한라산이 환호한다                             세계의 선량한 마음들이 뜨거워진다                                                        3천리 금수강산 푸르게 열리는 하늘에                             칠색 고운 통일의 무지개 비끼는가                             하나로 이어지는 길 여기서부터                             탄탄히 닦아지리라는 믿음이                             천천만만의 가슴들에 새겨진다                               닫혔던 시린 마음을 활짝 열고                             평화와 번영을 함께 심어가노니                             끊기였던 민족의 혈맥도 이어져                             평화와 번영의 뿌리가 얽히고                             천년로송으로 만고장청하리라                               미움과 알륵의 응어리를 풀고                             피어린 3.8선을 지워버리려는                             겨레들의 세기적 숙원은 헛되지 않으리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의로운 넋들이                             민족력사의 새 편장을 엮어가리라                               민족부흥의 오아시스를 마련하는                             남북화해의 경사로운 봄날에                             단비여, 천실만실 축복으로 내리라                             무궁화 동산에 숙망의 새싹이                             줄기차게 자라나 무성하게 하라                               평화의 봄이 이미 깃들었거늘                             번영의 가을이 아니 올소냐                             통일의 새 아침 우리들이 열거니                             찬란한 저 빛을 가리울자 누구냐                             평화의 봄꽃이 활짝 피여나라                                      2018년 4월 27일                            (북남 두 정상의 력사적만남의 날에)                                                  (판문점선언 기념 통일시집) 2018년 8월 13일 초판                          에 수록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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